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오케 할머니 서비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03

나의 길(94) * 아이의 일기장을 보면서... *


BY 쟈스민 2002-02-04

겨울방학내내 시골 할머니댁에 가 있던 아이들이 돌아왔습니다.

주인 잃은 방의 썰렁함도 이젠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채워지고,
밥 먹을 때마다 비워져 있어 바라보기만 하던 식탁의자에도
맛있게 밥 먹는 아이들이 해맑은 얼굴로 앉아 있습니다.

개학이 다가오니 슬슬 마음이 초조해지기도 하며,
이런 저런 준비를 하다가 아이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일기장에는 겨울방학 동안 일어난 일들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었어요.

매일 매일의 일기 내용에는 각 일기에 맞는 제목이 쓰여져 있었는데
제목만으로도 난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
이건 또 무슨 내용일까? 곰곰 생각하며 읽어 내려갔는데,
정말이지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산으로 운동, 강으로 운동, 돌고 돈 산, 눈물나는 하루, 강아지 올림픽 등등 ..."

아이의 생각은 지난해보다 분명 아주 많이 자라 있었답니다.

산으로 운동을 하러 갔을 적엔 겨울산의 느낌이 ...
강으로 운동을 하러 갔을 적엔 겨울 강의 느낌이 ...
고스란히 담겨져 있더군요.

얼음아래로 흐르는 물이라든지, 이름모를 새 들 이야기가
그곳에 가보지 않은 엄마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길을 잘못들어서 사촌동생과 함께 간 동네 야산을 몇바퀴나 돌았던 이야기 ...

할아버지께서 어쩐일인지 자신의 동생만 예뻐하시는 것 같다구 하며
은근히 시샘이 났는지 눈물나는 하루를 혼자서 조용히 써내려가던 아이 ...

시골집의 똘똘이라는 강아지와 학교 운동장을 돌며
누가 누가 잘 달리나 달음박질하던 강아지 올림픽 이야기 ...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참 따뜻하고, 평화롭기까지 했습니다.

매일을 학원갔다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공부하고, 잠잤다는 것외엔
쓸 이야기가 별로 없었을 엄마, 아빠와의 바쁜나날들을 마다하고,
시골로 가기를 정말 잘 한 것만 같았습니다.

엄마의 손길로 빚어내는 아기자기한 시간은 함께 보내지 못했지만
대신에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돌아온 아이들은
정신적 성숙만큼이나 키도 훌쩍 자라 있었습니다.

아이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시간들을 추억으로 간직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자신의 일기장을 가슴에 안고서 마냥 뿌듯해하는 모습은 정말 예뻤습니다.

할아버지와 구구단을 외우던 기억,
시골에선 귀한 음식에 들었던 햄버거를 오랜만에 먹어보던 기억 ...
그 모든 기억들이 마냥 자랑하고 싶고, 즐겁기만 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에겐 그렇게 나마 방학동안 맘 놓고 천진스럽게 자연과 벗하여
보낼 수 있는 시골집이 있어서 참 좋아 보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엄마 품에 아이는 푹 안기어 보는걸 보니
아마도 아이는 그동안 못본 엄마 얼굴을 실컷 보려는가 봅니다.

아이에게 이것 저것 배우게 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할머니댁에 보내기를 잘 한것 같습니다.

아이의 정서가 아주 안정되어 있어 보여서
엄마인 나는 아주 많이 고마운 마음입니다.

아이의 일기장에 쓰여진 마지막 이야기를 다 읽고 난뒤
공책을 덮으면서...

난 더 많은 걸 바라서는 안될것이라고 ...
그저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만을 바래봅니다.

그러면서 난 그전보다 잔소리를 좀 줄여야겠다고...
아이에게 조금만 더 살갑고, 다정한 엄마가 되고프다고 ...

혼자만의 일기 감상문을
내 마음에다 조용히 적어 봅니다.

푸릇푸릇한 새싹이 바로 내 곁에서 새록새록 자라고 있음에
나도 모르게 절로 흥겨운 콧노래가 흥얼거려집니다.

나는 이렇듯 뭔가를 가득 얻어 돌아온 느낌인데 ...
부모님들은 또 텅빈 마음이셨는지, 몇번이나 전화를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가져다 주는
그 어떤 보물보다도 소중한 의미를
나는 이제 조금씩 알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