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언니는 나랑 여덟 살 차이가 진다.
어렸을 적 내 손등이 트면 언니는 따뜻한 물을 대야 가득 떠서 방안으로 들고 왔다.
언니는 내 손을 따뜻한 물에 불려 때를 밀어내고 자기가 쓰던 크림을 발라 우둘투둘하던 손등을 매끈하게 만들어 주곤 하였다.
사립문 밖 도랑 건너 논에 가득한 자운영 꽃에 관심을 갖게 해 준 것도 큰 언니였다.
“자운영 꽃밭이 마치 양탄자를 깔아 놓은 것 같지?
신발을 벗고 그 위를 걸으면 어떤 기분일까?”
언니는 마루에 엎드려 열린 사립문을 보며 중얼거리곤 하였다.
그 전에 무심하게 지나치던 자운영 꽃밭을 그 후엔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나물 캐러 갔다가 신발도 양말도 벗은 맨발로 자운영 꽃밭을 몇 발짝 걸어보기도 하였다.
서늘하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발바닥에 와 닿았다.
그 시절 봄 날 자운영 꽃은 지천으로 널린 것이어서, 언니가 아니었다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평범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오월의 훈풍에 포풀러 잎새가 나부끼는 소리를 듣게 해 준 것도 언니였다.
“저 소리를 들어 봐, 그리고 반짝이는 저 이파리들 좀 봐.”
언니는 내 손을 잡고 포풀러 나무 밑에서 위를 올려보도록 했다.
그 후 살면서 오월의 포풀러 나무를 올려보며 귀 기울이는 기쁨을 반복해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언니 덕이었다.
난생 처음 남학생으로부터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고, 당황해서 아궁이 불 속에 집어 넣다가 꺼낸 것도 큰 언니 때문이었다.
언니에게 보여 주어야 할 것 같았던 것이다.
난생 처음 하게 된 데이트가 부끄러워 싫다는 나를 억지로 등 떠밀어 보낸 것도 큰 언니였다.
그 날 제과점에 가서 무엇을 시키라고 가르쳐 준 것도 큰 언니였다.
지금은 내 남편이 된 그 남학생을 그 때부터 이뻐하던 언니는 지금도 항상 남편 편만 들어서 날 불평하게 만든다.
빨강 털 스웨터와 까만 쫄쫄이 바지를 입을 수 있었던 것도 큰 언니 덕이었다.
시골 초등학교엔 그렇게 멋진 옷을 입은 아이가 극히 드물던 때였다.
책을 좋아하던 큰 언니는 내가 새로운 지식을 접할 수 있는 통로 구실도 하였다.
일 주일이 멀다 하고 새로운 책을 집에 들고 오곤 하였다.
내겐 읽는 것이 금지된 책들도 많았지만 언니가 잠들길 숨 죽여 기다리다 읽곤 하였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을 읽은 것도 초등학교 다니던 때였다.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재미도 없는 책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책이었다.
큰 언니 덕분에 난 똑똑한 아이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숙제 한 번 안 해 가도 공부 잘 하는 아이였다.
언니 덕분에 숱하게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던 내게 시골 초등학교에서 우등생 소리를 듣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시골에 살면서 매일 신문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신문사에 근무했던 큰 언니 덕이었다.
언니는 퇴근하는 길에 신문 한 부 들고 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초등학교 저 학년 때 교실 두 칸을 터서 만든 학교 강당에서 연극 구경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언니 덕분이었다.
‘자명고’라는 제목의 연극이었다.
낙랑공주가 사랑에 빠져, 나라에 위험이 닥치면 절로 울려 적군의 침입을 알려 준다는 자명고를 칼로 찢는 내용이었다.
낙랑공주 역할을 맡은 큰 언니는 정말 아름다웠다.
언니가 다니던 학교 학생들이 만든 연극이었지만, 시민문화관과 군 부대에서도 상연되어 호평을 받은 연극이었다.
주인공인 큰 언니가 다녔던 초등학교라고, 특별히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와서 상연을 한 것이다.
언니를 연극무대에서 보는 것은 가슴 뛰는 경험이었다.
예쁘다고 소문난 언니였지만 공주 의상을 입고 분장을 하고 나타난 언니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내 언니가 분명한지 믿어지기 어려울 정도로…
큰 언니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요즈음엔 큰 언니 덕분에 호강이 늘어졌다.
병간호를 한다고 와서 밥해 주고 빨래해 주고 살림을 다 해준다.
아침에는 당근 즙도, 양배추 즙도 대령한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약 먹으라고 물도 떠다 준다.
내가 할 일이라곤 다 차려진 식탁에 가서 감탄사를 발하고 먹기만 하면 된다.
먹다가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그래도 언니는 웃기만 한다.
무엇이 먹고 싶은지 말만 하란다.
어머니 밥을 얻어 먹고 살 때도 이리 호강을 하고 살았나 싶다.
형부도 같이 와서 청소를 도맡았다.
내가 많이 아프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저 베풀기 좋아하는 언니를 위해 환자 노릇을 하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