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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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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그 애증의 이름


BY 이화 2001-12-04

나는 없는 집의 맏며늘이다.
없다는 것은 물론 재산을 말한다.
돌아가신 시아버님께서 둘째이신 관계로
다행히 장손의 아내-종부는 아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재산이 없다는 것, 가난하다는 것이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까지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절박한
문제인지는 정녕 몰랐다.

장남인 남편이 결혼하기 전에는
가난을 거의 숙명으로 여기고 살았던
시집이 며느리 하나 들이면서 갑자기
뼈대 있는 가문인양 으시대는 폼도
석연치 않았지만 항렬의 높고 낮음 없이
돈 때문에 싸우는 모습에는 아주 질려버렸다.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장손의 특혜를 누리며 작은 아버지(시아버님)의
도움으로 대학물을 먹은 큰아주버님은
집안과 담을 쌓고 처가 사람이 되어 산다.

그래서 내일 모래 아흔이신 시할머님은
시어머님 차지이며 시할아버님 제사도 시어머님이
모신다. 명절과 제사 때 큰집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의절하고 사는 것이다.

남편과 연애할 때부터 시할머님은 나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셨다. 비록 말씀을
함부로 하시고 행동이 연세답지 않게 경망스러워
동네에서 신망을 얻지 못한 어른이시지만 그래도
집안의 어른이신 그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남편과 결혼 할 수 있었다.

집안의 어르신들이 할머니 험담을 많이 해도
나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버렸다.
손부로서 나의 의무를 다하면 그것이 집안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뵐 때 마다
빠지지 않고 용돈을 드렸고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는 일부러 할머니를 뵈러 시골에
갔다 자고 오기도 하였다.
시집에서 그렇게 하는 자손은 오직
남편과 나 뿐이었다.

할머님에 대한 나의 마음은 하늘을 우러러
아무런 계산이 없는 순수한 것이었다.
그분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셨기에
조금이라도 갚고자 하였고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집안에서 공경받지 못하는 할머님의 처지가
안되어 보였기도 하였다.

아무도 마음 쓰지 않는 생신 때
눈길을 헤치고 달려가 생신상을 차려드렸을 때
시고모님들은 나의 손을 잡고 우시면서
고마와 하셨다. 할머님 역시 너 뿐이라며
과분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데 남편과 부부싸움이 있었는데
말끝에 할머님 이야기가 나오고
시어머님 이야기가 나왔다.

남편왈,
당신이 할머니한테 잘한게 뭐가 있냐...
우리가 엄마한테 해준게 뭐가 있냐...

십여년을 살면서 그렇게 억장이 무너지기는
처음이었다. 의식하면서 효도 한 것은 없지만
남편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만큼 못하고 살지도
않았다.

집안의 어르신들은 꼭 물질적인 것이
뒤따라야 효도 받았다고 생각하시나?
그럼 부모에게 물려받은거 하나 없는
우리 같은 사람은 평생 불효자겠네?

뭘 어떻게 해야,
돈을 몇 백 몇 천만원씩 가슴에 안겨드려야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에게 잘했다 하나?
돈으로 효도할 수 있을 만큼
자기가 많이 벌어다 줬나?

돈으로 효도하고 살 수 있으면
그게 가장 편한 방법이다.
가기 싫다는 애들 끌고 시골의 독한 모기에게
헌혈하지 않아도 되고 또 한가지, 언제나 남편과
잠자는 시어머님, 나는 시누이 애들까지
데리고 좁은 방에서 새우잠을 잔다.

그들이 살아온 이력이 바뀌지 않으리라는걸
알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적응을 한 것이다.
그런데 결국 듣는 말이라는 것이
당신이 한게 뭐가 있냐라니...

그래...
그렇게 생각했었단 말이지
내가 시집을 위해 당연히 해온 것들을
당신은 내심 잘잘못을 재고 있었단 말이지
내가 마음 아파하고 육체적으로 힘들어 할 때는
못본척, 모른 척 했던 사람이......

너무 기가 차면 말이 막힌다더니
당해 보니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겠더라.

알아주길 바란 적도 없지만 남편의
세치 혀 끝에서 짓밟힐 정도로
내가 잘못한 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시집에 대한 마음을 딱 접었다.

그리고 의무만 하기로 했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편리한 방법-
마음도 정성도 담기지 않은 의례적인 전화를 드리고
시집에 가도 웃지 않고 얘기도 하지 않는다.

가장 불편하고 손해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어차피 이런 말 들을 것을
뭉태기 돈을 갖다 안기지 않는 한
며느리가 듣는 소리는, 아내가 듣는 소리는
결국 이소리 뿐인 것을.

당신이 이 집안에서 한게 뭐가 있어?
당신이 엄마에게 해준게 뭐가 있어?

내가 시집오기 전에 당신은 그렇게 효자였나?
그럼 영원히 효자로 살지 결혼은 왜 했어?
나한테 사랑한단 말은 왜 했어?

효자, 벗어날 수 없는
족쇄 같은 그 이름이 나를 슬프게 한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당신의 동네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