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25일.
내가 일한 만큼 품삯을 받는 날이다.
덧셈,뺄셈의 산수가 어려운 내게 아이들이 수학경시대회가 있다고 말하고....
전자 계산기에선 가능하나 손가락으로 헤아려지는 숫자가
되지 못하는 집을 사겠다고 계약을 해두고
....이.사.를 하고 여러날이 흘렀다.
25일이 지나면 두 군데서 사용하는 카드의 청구서에 찍힌대로
돈이 소리없이 빠져 나간다.
나가야 할 돈들이지만, 제때 빠져나가야 당연한 일들이지만
30일쯤 거의 바닥이 난 통장들을 마주하고선
한달 또 잘 살았네.
숨을 놓는다.
어제 25일.
약속이 물러나고 며칠을 뒤덮었던 안개가 꼬리를 흔들어
안개비가 되어 내리던 날.
손가락을 묶었던 실밥을 빼내고 간이영수증을 받아 넣고
좀 게을러지고 싶은 소망을 이루고 싶어서
카드대금이 빠지기 전의 기운 넉넉함으로 시장을 보았다.
이슬 두병.
중국산 죽은 낙지 1킬로그램,어묵 두 봉지. 푸른 배추 한 포기
라면 열봉지.호빵 열 두개.모가지와 사지가 잘린 닭 한마리.
두부 한 모,초쿄파이 한 상자,대파 한 단, 떡볶이용 떡 두 봉지,달걀 한 판...
특 매뉴 낙지볶음 옆으로 이슬이 기울고...아이들이 밥을 먹었다. 스러지고 있는 초코파이 상자...내일은 일요일.
조금 아주 조금만 게을러지고 싶은 소망이 이즈러지고 이슬이
나를 방바닥으로 끌고 가고 밤새 꿈속에서 푸른 배추가 날아다녔다. 다른때 같았으면 이미 끝냈을 겨우살이 김장을 끝내지 못했더니 꿈속
까지 시끄럽고 복잡하였다.
한 네티즌에서 강남 아줌마들의 이유있는 치맛바람의 글을 읽었다. 새벽 네시 . 사립학교와 인맥 형성들. 아이들이 잘 되고,
잘 살게 하기 위한 마담들의 이야기가 새벽의식속에서 풀어져 내린다. 결국 돈많이 벌어 우아하게 사는 길이 잘 사는 거라는 대답으로 여겨지는 글을 읽으면서 사는 게 힘들다...
혼잣말을 하다 아이에게 들켰다...엄마는 맨날 그렇게 혼잣말을
잘 하세요. 글쎄다.
김장을 해야 하니깐...문득
나비 넥타이를 맨 강남에서 만난 한 남자가 "김치를 집에서 하나요 .. "생경스럽게 물어서. 김치도 직장생활도 당연한 일상이라 대답해놓고 제일 힘드는 것이 아이들 키우는 거라 했더니 그 남자도 그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여섯군데 다니는 학원으로 힘들어 한다는 그 집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였고...굼벵이나 똥강아지로 불리는 엇그제 집안에 소화기를 터트려 온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우리집의 아이도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들은 소화기를 틀어보지 않아서 사용방법은 알지만 ... 해놓고 내가 끓는물에 멸치를 넣고 돌아서자 거실에서 앞이 안보이게 부우연 소화기의 분말 가루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소화기를 놔두고 집안 식구 모두들 바깥으로 내달렸가 사흘을 쓸고 닦아도 남아도는 분진들 위에서 오늘 이후로 우리는 서서히 죽어가는 거라고 했더니 아들이 침대위에 앉아 눈이 벌겋게 울고 있었다. 저는 아직 할일도 많고 하고 싶은일들이 많아서 죽기 싫은데 저 때문에 모두들 죽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며 엉엉 우는 것을 보고 나는 아이들의 소화기 사건을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눈물나게 웃고 아이를 안아주고 안심시켜 주는 것으로 소화기 안에 든 물질이 무엇인지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려주었다.
통장에 잔고가 조금 남는다면 나는 조금 게을러지고 싶은 내 소망을 뒤로 하고 다시 소화기를 사러 가야 하고
한 50포기쯤 김장을 해서 땅에 묻어야 하고
어머니 땅에 다녀오고 싶고
이슬을 두 병 사 두고 친구를 기다리고 싶다.
조금 게을러지고 싶은 내 소망은 대여섯시간쯤 아이들 간섭없이
이불속에 숨어서 죽은 고기처럼 있고 싶고
이불속에서 밀려둔 책을 읽고 싶고
지난번에 밤새워 하지 못했던 게임 하나를 모두 깨부수는 일
하루쯤 일상을 잊어버리고 싶은 일인데...
아서 말아라.
월말이란다.
2001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