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유년시절(4)
70년대.중반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숫자 개념엔 희박하다.
금방 구입한 물건의 값을 듣고는 또다시 묻곤 한다.
아마 중학교 그여자 수학선생님께 향한, 반항의 나쁜 병이
스스로를 학대한 죄에 벌인것 같다.
(그전엔 산수가 즐거웠으므로)
국민학교 5학년....
신 학기여서 환경정리를 한다고 선생님께서 지명한 사람은
남아서 환경정리하고 방가 하라고 하셨다.
모두 남자5~6명?...에 유일하게 혼자 여자인 내가 지명되었다.
수즙음이 많던 내 유년 시절엔 선생님도 남자신데 나혼자
남아 아무리 환경정리지만 내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도 걸어서 3~40분 거리였는데...
점심도 싸오지 못해 해결하지 못한건 아무련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집에 가는 길이 걱정이었다.
시골길을 혼자 가는것에 대한 무서움 해가 질때 여자 혼
자 어떻게 집엘 갈지 걱정이었다.
학교를 벗어나면 과수원사이, 논두렁 사이를 가야 하는데.
한번도 늦게 귀가를 해본 역사도, 혼자 가본적도 없는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땐 문둥이가 애를 잡아다가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도
나돌고...
가끔씩 학교주변에도 거지들이 많이 나돌았던 기억이 난다.
거지들이 학교안에도 들어와서 우리들은 기겁해서 도망가던
때..그런 거지들이 어린이를 잡아가서 무섭게 한다는
소문이...
여자 혼자 학교에 남아 환경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무조건 거부감을 느껴
난 애들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도망을 쳤다.
우리교실은 2층인데 남자애들이 도망가는 나를 발견하고
"저 가시나! 도망간다!"
그땐 이름보다 그렇게들 불렀던 같다.
나보다 키크고 힘센 남자 애들이 협동해서 나를 잡아다가
어깨위로 올려져 2층교실로 잡혀 들어 갔다.
선생님께선 남은 2명의 애들과 난로불(장작)가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고 계셨다.
도망간 죄로 복도에서 찬 시멘트 바닥에 꿇어 앉혀 벌셨다.
교실 복도로 난 환기창으로 나를 감시하며 남자 애들은 히히덕...
김이 무럭무럭나는 고구마를 먹으며 나를 놀렸다.
배도 고프고 난로불위에 김이 무럭무럭나는 주전자의 따뜻한
물 한모금도 부러웠다.
시멘트 바닥의 찬기운, 시린 발과 꾸부려진 다리가 무척 아
팠다지만 집에 갈 걱정으로 그 뒤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땅거미가 어둑해질 무렵 집에
귀가하게 되었다.
물론 점심은 해결하지 못했다.
배고픔은 잊고 양쪽으로 길게 널어진 과수원길 사이로
저만치서 남자가 혼자 걸어 오는 모습에 바짝 긴장....
점점 가까이 오면서 그도 중학생으로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뛰고...방망이질 해대는데..
모습이 뚜렷이 확인 될 무렵...이상한 물체가 바지 사이로
출령출렁...거렸다.
할아버지들이 차고 다니는 나무로 만든 안경집인 것 같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 갈수록 그게 아니였다.
망칙하게도 남성의 그것이였다.
교복 윗도리와 바지사이로 내어진 그물건을 너무 어린 나이
에 목격했다.
하지만...지금도 뚜렷하게 잘생각나지 않는다.
오직 이자리만 모면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랩으로 기도하
며 거의 두눈 시선은 과수원 담장으로 내려서 서로를 긴장
하며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니...순간이 깜깜한 악몽이었다.
그사람 남학생과 스쳐지나 가고 나니 그게 아차!~
그것이 였구나. 내가 잘못생각한 것이 였구나.
참으로 별희얀한 일이구나 생각되어 졌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 헐레벌떡 집에 온것 같았다.
원장선생님은 내가 늦은지도 모르시고 저녁식사도 다아
마친 상태였다.
배가 고팠지만...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난 저녁도 굶었다.
어느누구의 관심도 없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가 부다 하고 ...
그저 무사히 집에 올수 있음을 감사드리고 편안한 잠자리
가 감사할 따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