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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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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여행중


BY 이화 2001-10-22

아줌마방에 들어와 글을 올리다가 보니
홈 페이지란에 이달의 글제는 여행입니다...
라는 글귀가 보인다.
뭐야, 글제?
이런게 있었나?
그냥 내가 쓰고 싶은거 올리는거 아니었나?

학창시절 때 멀쩡하게 잘 쓰여지던 글이
백일장이니 무슨 대회니 하는데 나가면
그날 나오는 시제나 제목에 따라서 그냥
시간이 다 가도록 생각이 콱 막혀서는
연필 꼭지만 내내 입에 물고 있다가
어흐...눈물 삼키고 나온 적이 여러번이었다.

그래서 애시당초 무슨 제목에 따라 글 쓰는 건
포기한지 오래고 그저 설겆이를 하다가나
방을 닦다가도 섬광처럼 제목이 하나 떠오르면
만사를 제치고 아무데나 앉아 써야 했고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가 썼나...싶은
글이 하나 있고, 하나 있고 하였다.

계절이 가을이다 보니 '여행'이라는 제목이
나올 법도 하겠다 싶어 머리 속을 이리저리
헤집어 보아도 제목에 맞춘 글은 아무래도
쓰여지질 않는다. 말 그대로 제도권의 이탈-
내 사주에 반골기질이 있다더니 이것도
그런 기질의 반영인 것인가?

결혼할 때까지 태어나고 자란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결혼후 어디서 살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튼실한 자기 가슴을 탕탕 치며
걱정마, 당신 고향에서 정년 퇴직할 때까지
있을테니까!...했었다.

그때는 그 말이 얼마나 반갑던지.
기다리던 차에 내밀어주는 손을 잡듯이 나는 냉큼
결혼했다. 그리고 고향에서 딱! 이 년 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짐보따리와 아이들을 매고 끌며
지금도 여행다니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
고향을 떠나 첫이사를 할 때 남편의 언행은
지금 생각해도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어느 날 퇴근해서는 서재를 뒤적거려 커다란 지도를
들고나오더니 내 앞에서 좌악 펼치고는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궁금해서 다가간 나에게
당신, 충청도 가봤어? 거기가 참~~~~여행 다니기 좋아
음...서울도 가깝고 뭐, 강원도 설악산은 매일 갈 수 있지
그리고 당신이 가고 싶어한 월악산도 바로 옆이고
치악산, 월정사, 포천 이동갈비...서해안도 가깝구...

남편이 펼쳐보이는 감언이설에 까무룩 속아
이제 돌 지난 큰애를 뒷자석에 태우고 또 엄청 부른
배를 안고 이삿짐 차에 올라탔다. 눈물 그득한 얼굴로
나를 배웅하던 친정엄마의 모습도 사라지고
처음 보는 낯선 거리 풍경이 불안으로 다가왔을 땐
이미 고향으로부터 떠나온 터였다.

한번 재미를 본 남편은 이사를 할 때마다 이 수법을
써먹었다. 음...당신...남해, 동해는 자주 가봤어도
서해는 별로 못가봤지? 거기 가면 조개도 캘 수 있고
어디 가면 토굴을 파서 새우젓을 저장하고 말이야,
섬도 아주~~~~좋은데가 많은데...
(말 꺼내고 이틀 뒤 서해안으로 이사감)

임진강 가봤어?
판문점 안 가보고 싶어?
무엇보다 말이야, 당신이 제일 가고 싶어하는 강화도!
백령도 갈려면 강화도에서 가는게 제일 빠른데 말야...
우리 이번 여름에 백령도 한번 가봐야지?
(한달 뒤 경기 북부로 이사감)

대한민국 사람은 말야, 뭐니뭐니 해도
서울이 제일 좋지 않겠어?
당신이 좋아하는 고궁, 박물관, 아! 맞다, 인사동!!!
서울에서 살면 내가 매일 데려갈텐데...
좋은 공연이며 전시회 같은 것도 지방은 시간이 안되서
못가도 서울에는 웬만한 예술가는 다 오잖어...
(두달 뒤 서울로 이주)

당신이 유일하게 안가본 곳이 전라도지?
크...남도...먹을거 많고,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정말 그쪽이 볼거리가 많은 동네야
오죽하면 남도는 전체가 예향이라고 했겠어?
서울 살다 지방에 가면 금방 돈을 모은다네?
사실 서울은 사람 살데가 못되지.
(조만간에 전라도로 이사가게 생겼음)

아이들은 여행 좋아하는 엄마 아빠에 질렸는지
어디 가자...그러면 엄마 아빠나 다녀오세요...
다섯 살 때부터 이런다. 엄마로부터 잘 떨어지지
않는 자녀가 있는 사람은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소리가 아주 섭섭하다.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다니...

이사뿐만 아니라 원체 다니기를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계획에 없는 여행을 갑작스레 가게 되어도 준비는
오분이면 뚝닥뚝닥 끝난다. 가서도 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해먹는 스타일이라 바구니에 집에서 쓰는
간장병이며 양념통을 그대로 줏어담고 목욕도구와
아이들 옷가지 몇개 챙기면 그대로 출발이다.

행선지와 숙소, 기타 스케쥴은 남편이 짜놓은대로
우리는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원체 여행이
생활화 되다 보니 비용도 별로 들지 않으며
처음엔 지옥에나 가는 듯이 무섭게 느껴지던
이사조차도 조금 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듯이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들 먹여 살리겠다고 승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곳으로 발령을 자처해서 가는 남편의 심정을
나도 이해하게 되었고. 그래서 친척들은 우리 부부를
전천후 부부라 부른다. 전국 어디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전천후 부부-

인생 자체가 이승에서의 잠시 잠간 여행이라는 말이 있다.
남들 눈에는 우리 가족 사는 것이 별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한정된 시간 속에서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복된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그나저나 이사를 하려면 겨울 전에 해야지...
갈려면 얼른 가야지...
이젠 내가 이사, 아니 여행 갈 날을 더 기다린다.
우리 가족은 지금도 여행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