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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볶음 탕?


BY 박예천 2009-04-04

 

                 배추 볶음 탕?

 


도대체 제대로 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도통 떠올릴 수가 없었다.

“엄마! 나 그거 먹고 싶어. 오늘 저녁에 해줘요.”

“뭔데?”

“왜 있잖아. 배추에 돼지고기 넣고 새우젓도 들어가는 거.”

단박에 알아듣기는 하였다. 헌데 정확한 음식이름을 뭐라 정할지 고민스러웠다.

어릴 적 할머니 손에 만들어져 익숙하게 먹어온 것이라 생각나는 대로 몇 번 만들어 주었었다.

입맛 없던 봄날이라 밥 수저 드는 일에 힘이 없더니 불쑥 생각났던 모양이다.

딸아이가 배추에 돼지고기 넣고 새우젓도 들어간 음식을 해달란다.


내 맘대로 식, 이름도 애매한 배추요리-요리라 하니 거창한듯하나 지극히 단순하다-를 딸아이 저녁 찬으로 준비한다.

통배추 한 통과 돼지고기 약간을 샀다. 비계가 적당히 붙어 있어야 배춧잎이 부드러워지는 것에 도움이 된다.

밑 둥을 잘라내고 한 잎씩 떼어낸 배추를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는다. 소쿠리에 건져놓아 물기를 뺀다. 노랗게 들어찬 속고갱이는 다른 날 쌈장 찍어 먹을 셈으로 비닐봉지 싸서 냉장고 채소 칸에 보관한다.

이 음식은 마늘 다지고 파 써는 일 외에 칼과 도마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첨가물도 서 너 가지면 되니 가장 소박하게 배추자체의 맛을 즐길 수 있다. 

돼지고기도 먹기 좋게 찌개거리만큼 썰어둔다.

우묵하고 투박한 프라이팬 재질의 전골냄비를 준비하여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불을 켠다. 어느 정도 팬이 달구어졌을 때 들기름을 듬뿍 두른다. 불 온도는 세지 않게 조절해둔다.     

씻어 둔 배추를 알맞은 크기로 찢어 소복해질 분량까지 팬에 담는다. 새우젓 적당량을 넣는다. 여기서 적당량이라 함은 배추의 양도 살피고 간이 될 만큼을 말한다. 고춧가루도 한 숟가락 넣는다. 기호에 따라 매운 것을 원하면 양은 조절할 수 있다. 돼지고기도 얹는다. 식성에 맞춰 조미료양념을 첨가하기도 한다.

그러면 일 단계는 땡이다. 뚜껑을 덮어두면 중불에서 푹 익어간다. 가끔 양념과 돼지고기가 골고루 섞이도록 뒤집어 준다.


들기름의 구수함과 새우젓의 깊은 맛이 절묘하게 끓으면서 기가 막힌 냄새가 난다.

어느 정도 소복했던 배추무더기가 숨죽었을 무렵 뚜껑 열고 다진 마늘과 숭숭 썰어 놓은 파를 얹으면 더 들어갈 양념이 없다. 약한 불로 줄이고 뭉근히 끓여대면 요리 끝이다.

배추가 익어가는 동안 다른 반찬을 준비하거나 밥상차려도 된다. 책 읽거나 다리 뻗고 티브이 드라마를 쳐다본들 음식이 타는 일은 없다.

코끝을 자극해오는 냄새에 숟가락 몇 번 간보는 행위만 허락될 뿐이다.

진짜로 물 한 방울 넣지 않았건만 시간이 흐를수록 배추에서 우러나온 국물이 탕수준이다. 안보는 사이 누가 바가지로 물이라도 퍼부은 듯하다.

사람 몸의 칠십 프로가 수분이라더니 배추는 껍질 빼고 전부가 물인가 보다.


학원에서 딸아이 돌아올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방싯거리며 나불거릴 그림이 떠오른다.

그나저나 이 음식의 이름을 정하는 일이 더 급하다. 먹고 싶을 적마다 배추로....., 돼지고기...., 어쩌고 하는 긴 이름을 말하기는 그렇다.

친정엄마께 전화를 넣었다.

“엄마, 그거 있잖아. 배추 볶다가 돼지고기 넣고 새우젓....., 할머니가 화롯불에 해주던 거...., 이름이 뭐였지요?”

이거야 원! 딸아이와 똑같은 말투로 친정어머니 향해 설명하고 있는 나를 본다.

“배추 지지미인가? 볶음? 에구구....허리야 나두 모르겠다! 그게 뭐 중요하냐.”

지지미는 빈대떡종류이고 볶음도 분명 아니다.

물리치료실 침대에 누워 찜질중이라며 말끝마다 신음소리를 내민다.

통증 때문인지 어머니는 대충 대답한다.

갑갑증이 밀려와 참을 수가 없다.


마릿골 박가네 안방 홀로 누워 손녀의 이름도 가물가물하실 할머니를 찾을까.

아흔 한 살 기미년 생 울 할머니. 류관순 독립만세 외치던 해 태어나셨다지.

치매로 갉아먹은 기억이 하루에도 몇 번 맏아들이 조카로, 며느리는 손윗동서로 역할 바꾸기를 한다. 

이러한 지경이니 당신손녀 학교에서 돌아올 겨울 해거름 맞춰 무쇠화로에 올렸던 배춧잎을 기억이나 하실까.

숭덩숭덩 찢어 넣은 잎사귀가 달큼하게 제 물기를 쏟아내도록 졸지 않게 뒤집던 세월 어디쯤에 묻어두셨는지 모르겠네.

당신의 몸은 이제 물기도 없이 자손 위해 쪼그라들어 빈방지기 늙은이 되었건만.

칠순 향해 가는 내 어머니도 허리 휘고 물기 빠져가는 육신, 치료실 찜질에 의지하고 있다하니 전부 가슴 저미는 일 뿐이로다. 


줄여놓았던 가스 불 끄고 마지막 간을 본다.

군침 돌게 맛있다. 양 볼이 미어지도록 먹을 딸아이 모습이 미리 떠오른다.  

배추, 새우젓, 돼지고기도 제고집을 피우지 않았구나. 뻣뻣하게 숨죽지 않고 버텼다면, 끝까지 짠 내만 품고 있었다면, 마지막까지 느끼한 덩어리로 남았다면 이토록 훌륭한 음식이 될 수 있었을까.

섞이고 녹아지며 스미다 보니 맛난 배추요리가 되었다.

구십 평생 퍼준 사랑만큼, 칠십 내내 옮겨준 정만큼 배춧잎이 입안에서 흐물흐물하다. 

됐다! 요리도 완성 되었고 어설프게나마 이름도 정했다.

배추 볶음 탕!

딸아, 이제부턴 말더듬지 말고 이름 기억해다오.

더불어 배춧잎 따라 녹아내렸을 어미의 사랑까지도.




2009년 4월 3일 딸아이 위해 유년의 배추음식을 만들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