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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21 - 외할머니 댁


BY 박예천 2009-01-06

 

             외할머니 댁

 


 


방학 때마다 있어지던 어린 시절 여행이 떠오른다.

외할머니 댁으로 가기 위해 우리 삼 남매는 서둘러 준비를 한다.

일기 쓰기는 미리 할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남겨지는 숙제가 없도록 며칠 동안 벼락치기로 해버린다. 그래야 맘 편하게 방학 내내 놀 수 있다.

여주 읍내에서 삼십 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면 우만리 외가이다.

자연을 벗 삼고 자리한 마을 풍경은 마릿골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외가의 새벽은 빨리 시작되었고 밤도 속히 왔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궁금증이 유난히 많아 묻기를 잘했던 나는 엄마에게 여쭈어 본적이 있다. 왜 외할머니 댁에만 가면 하루가 금방 가느냐고 했던 것 같다. 처음에 엄마는 놀기 좋아하는 내가 해지는 하루마감을 아쉬워하는 물음인줄로 아셨다. 자세히 듣고 나시더니 주위로 산이 둘러싸인 마을이니 그렇다고 알려주신다. 병풍처럼 마을을 휘감고 있는 산들이 있고 가운데 폭 파묻힌 동네였으니 뜨고 지는 해가 마을에 오래 머물지 않고 사라졌던 것이다.


따로 여행 가방이 없던 시절.

엄마는 옷가지와 일기장 등을 책가방에 넣어 주신다. 삼 남매는 그렇게 학교 가는 차림새로 방학 식 며칠지난날에 외가로 향한다. 친손자들도 꽤 많으셨는데 대문 입구에서부터 큰소리로 반기시는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종사촌 형제들까지 법석을 떨며 외가로 모여들었으니 방학은 우리에게만 신나는 일이요, 집안 살림 도맡아 하시던 외숙모께는 귀찮은 일거리 하나 더해드리는 꼴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서울 살고 있는 외사촌들까지 바글거리며 합세를 하게 되면 방학기념 캠프촌이라도 열어놓은 양 날마다 시끌벅적 이었다. 끼니때마다 녀석들 밥이며 찬거리 준비하시느라 외숙모께서 힘겨웠을 생각은 시집와서 아이들 낳고 키워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낯이 두꺼운 외손녀가 되어 여름과 겨울방학만 되면 내내 가서 살다시피 했으니 대단한 불청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눈치 밥을 주시거나 싫은 내색 없이 푸근하고 자상함만으로 반겨주시니 날마다 가고 싶었고 개학되어 오는 날이 싫어졌을 정도로 외가가 좋았다. 


공간적 배경은 같은 시골이건만 왜 그리도 외가에만 가면 놀이할 공간이며 재미거리들이 더했는지 모르겠다. 똑같은 놀이도 외가마을 얼음 논바닥에서 하는 팽이치기가 윙윙대며 더 잘 돌아갔고 여름철 물놀이하는 것에도 남한강 줄기 굽이치던 그곳이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웠다. 멱을 감으면서 잡던 다슬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속에 손만 집어넣으면 모래알인가 싶을 정도로 한 주먹씩 잡혀 나오던 그것들을 모아 아욱과 함께 끓이면 구수한 맛이라니.


식사 때마다 외숙모가 차려 내오시던 상차림에서 나는 외가의 부유함과 만났다.

마릿골 내 집에서는 계란찜 한 그릇에 입맛만 다시다가 끝나는 길고 지루한 밥상이었다. 귀한 계란찜이 커다란 양푼 가득 담겨져 나오니 질리도록 빠져 헤엄을 쳐도 누구하나 내미는 숟가락을 막는 이가 없었다. 계란찜은 시시한 축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생선구이며 맛 나는 다른 반찬들이 상위에 올라와 날마다 찬란히 빛났기 때문이다.

손이 크신 외숙모는 찬의 양도 얼마나 푸짐하게 담으시는지 보고만 있어도 배부를 정도였다. 그런 상차림을 매 끼니마다 대한다는 아이다운 기대감만으로도 외가에 가야한다고 속으로 굳게 결심했었다. 만약 엄마가 보내주시지 않더라도 버스비만 있으면 혼자라도 가방 싸서 가버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그 말은 아주 꼭 맞는 말임을 내가 증명할 수 있다. 마릿골에서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으뜸 오줌싸개로 알려진 나는 장소가 바뀌었대도 몸은 그대로이니 밤마다 하던 짓이 멈춰지지 않았다. 더구나 낮 동안 고단하게 뛰고 놀았으니 아무리 긴장을 하고 잠이 들어도 아침이면 흥건히 이불이 젖어있었다. 대단한 외손녀가 아닌가. 방학 내내 외할머니의 특별 애지 중지로 챙겨 먹이는 일에도 부족해서 오줌 싼 빨래까지 외숙모에게 얹어드렸으니 미운 털이 박히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릿골에서 단골로 했던 키 쓰고 소금 얻어오는 일도 시키시지 않으니 당시 이보다 더한 천국이 나에겐 또 없었다. 지금까지 머리 조아리도록 외숙모께 고마움을 느끼는 부분은 잘 먹여준 반찬에서보다 오줌 싼 일들을 끝까지 친가에 일급비밀로 해주신 일이다.


개학이 다가오며 달력의 동그라미가 조금씩 늘어나 집으로 돌아갈 날짜를 알려준다.

외할머니는 내일이면 친가로 돌아갈 녀석들에게 장날 사 오신 새 옷을 입어 보라 내미신다. 몽실몽실 개털 같은 목둘레가 달린 긴 코트는 내 차지다. 아침에 새 옷 입고 친가로 떠날 생각에 부풀어 잠이든 나를 외할머니는 오래도록 지그시 내려다 보셨을 것이다.


드디어 다음날.

버스를 타려고 마을회관 앞에 삼 남매가 나와 섰다. 처음 방학 맞으며 집 나올 때 메던 가방들은 배가 더 불룩해져있다. 외가의 사랑을 주섬주섬 담아 채웠으니 부피가 더해진 것이다.  

멀리 멱곡리 쪽에서 버스가 구불구불 춤을 추며 시골길을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자 갑자기 외할머니가 편물조끼 깊숙한 호주머니에서 접혀진 지폐 몇 장을 빠른 동작으로 내 주머니 속으로 옮겨 넣어주신다. 엄마가 돈 주시는 거 받지 말라고 했는데 까맣게 잊은 척 태연히 주머니 속 돈을 만지작거렸다. 외할머니와 헤어지는 것은 아랑곳없이 그 돈으로 뭘 할까 머릿속에서는 벌써 계획들이 장황하게 세워지고 있는 철없는 외손녀다.


부르릉거리며 멈춘 버스 안에 차례로 인사를 하며 올라탔다. 출발하는 차 문이 닫히고 뒤에 빈자리를 찾아 통로를 달려가던 나는 커다란 유리너머로 외할머니의 작은 체구를 본다.

그때까지 느낄 수 없었던 외할머니 댁 떠나는 서운함이 밀려와 멀어진 버스길만큼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주 작아져 점이 된 할머니 모습이 자꾸 내 엄마로 보여 흐느낌이 멈추질 않았다. 

할머니를 엄마로 느낀 사랑의 부피만큼 외할머니 가슴엔 외손녀의 배웅을 친정 다녀가는 딸의 걸음으로 여기시는 것만 같았다.

이제야 조금 그 맘을 헤아리게 되는걸 보니 정말 여자는 시집가서 애를 낳아봐야 한다는 그 말이 맞나보다.



2005년 1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