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정부가 자녀 1인당 출산 양육비 1억 원을 지급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2,081

나는 더이상 동화를 믿지 않는다.


BY 선물 2008-04-23

봄은 너무도 짧았다.

눈을 호사시켰던 갖가지 색깔의 화사한 꽃빛에 취할만하니 금세 사라졌다.

큰 비도 아닌, 소록소록 내리는 가느다란 봄비에 연한 꽃잎은 스러졌다.

짧은 생에 대한 예감 때문에 더더욱 강렬한 아름다움을 분출했나보다.

화려한 꽃은 졌으나 그 자리엔 잎이 돋아났다.

명도와 채도를 달리한 온갖 연두와 초록의 빛깔이 세상에 피어났다.

꽃은 나를 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 했으나 초록은 그만 일어나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는 듯하다. 생명을 느끼게 한다.

그래, 이제 그만 일어나자.

툭툭 엉덩이 털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자.

산다는 것은 언제나 의문이었다.

내가 살아가는 건지 살아지는 건지 살아내는 건지.

때론 살아가고 때론 살아지기도 하지만 많은 시간 나는 살아내려고 애쓴 것 같다.

힘들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유혹을 가까이에서 느껴보진 않았다.

그렇다하여 살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해보질 않았다.

대체로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인 태도로 삶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옅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믿음이 작아질수록 자신감과 의욕도 빠르게 사라지는 것 같다.

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자 주위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내 자리가 낮아진 만큼 다른 이들이 높아졌다.

낮은 자리에서 보는 세상은 대체로 아름다웠다.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이 뻐근하도록 아름다웠다.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보니 그동안 내가 모르고 살았던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 배우고 또 배우며 세상을 향해 엎드리게 된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부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이들이 있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 지금은 우뚝 선 그런 이들이 아니다.

그런 찬란한 이야기는 나를 도로 주저앉힌다.

나를 일어서고 싶게 해 주는 것은 성공의 이야기가 아닌, 받아들임의 이야기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더 이상 동화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동화 속의 해피 앤딩은 언제나 놀라운 성공이었다.

어릴 때는 그것을 동경했을지도 모르겠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꿈같은 결말.

물론 살다보니 그런 경우가 아주 없진 않다는 것도 알게 되긴 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꿈꿀 수 있을 만큼 나의 생은 만만하질 않았다.

이제 동화는 내게 너무도 가벼움으로 다가온다.

대신 이런 이야기가 나를 감동시킨다.

살다가 고통을 만난다.

딛고 일어설 힘은 없지만 애써 그것을 피해 도망가거나 굴복하진 않는다.

그래서 고통과 함께 뒹굴고 부딪히고 하다가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고통을 통해 겸손함을 배운다.

그리고 삶은 달라진다.

특별히 더 나아지진 않았으나 전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예전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작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변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다.

어느 분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두 아들 모두 부모의 욕심에 한참 못 미치는 성장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두 아들에 대한 양육태도는 많이 달랐다.

큰 아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욕심을 갖고 작은 것 하나하나 다 챙겨주고 이끌어준데 반해 작은아들에게는 비교적 무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큰 아들은 끝까지 부모의 통제 아래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했고 작은 아들은 어느 날 스스로 자각해서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다.

물론 이야기의 초점은 작은 아들의 성공에 맞추어져있었다.

자녀의 기를 꺾지 말고 키워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관심은 작은 아들의 성공보다는 현재 큰 아들의 삶에 대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 아들은 그냥그냥 처자식 거느리고 밥이나 먹고 사는 정도라고 하였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작은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고마웠다.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어느 누구도 큰 아들의 삶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한 가지 중요한 것을 확인하지 못하긴 했다.

큰 아들이 지금 자신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나는 굳이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기로 했다.

마찬가지로 작은 아들이 성공해서 지금 행복한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아들의 성공이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준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딸과 아들을 둔 엄마이고 그들을 통해 기쁨과 절망 모두를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누구 못지않게 아이들의 성취를 갈망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성취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과의 잣대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물론 아이들이 누가 봐도 번듯한 성공을 한다면 나도 세상을 향해 어느 정도 기고만장하며 못난 내 삶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양 더 우쭐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자리에서 살아가든 그 아이들이 감사해하고 행복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진정한 성공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을 가르쳐주고 싶다.

조금 늦은 것 같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행복한 삶.

사실 그것은 누구보다 내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려면 또 앞을 향해 걸어 나가야 한다.

가만히 주저앉은 이에겐 그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동화를 믿지 않는다.

현실을 더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