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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의 40대 직장 여성과 MZ직원과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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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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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여자


BY 선물 2005-06-28

  누가 보아도 예뻤을 것 같은 때가 내게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한 때는 그러할 테지만 여하튼 나의 한 시절도 그렇게 꽃을 피웠다.
당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콧대 높은 여자이고 싶었고 세상이 제법 만만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앞날에 꿈만 화려하게 펼쳐져 있던 시절. 나를 그렇게 기고만장하게 만들었던 힘은 바로 다름 아닌 젊음이었다.
스물 초반,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던 그때 미장원에서 한 아줌마를 보았다.
축 늘어진 피부, 울퉁불퉁 튀어나온 뱃살, 부스스한 머릿결.
거울 앞에 앉아 있던 아줌마의 얼굴은 내 눈에 무척 볼썽사나운 모습이었고 미용사의 힘겨운 노력도 아줌마의 변신에 그닥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또 한 아줌마가 있었다.
마사지 실에서 허연 몸을 다 드러내고 마사지를 받고 있었는데 죄송하게도 그때 잠시 사람의 몸이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그분을 더더욱 추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줌마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물론 지금이라면 좀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분은 마도로스인 남편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회포를 풀기 위해 몸단장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깔깔대며 웃는 아줌마들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화끈한 밤에 대한 걸쩍지근한 농담들을 주고받았고 곁에 있던 나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양, 못 들을 것을 들은 양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십은 넘은 분들이었던 것 같다.
나이 많은 이들에 대한 결벽 비슷한 감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때때로 마흔 넘은 여인들의 치정이야기들을 접할 때면 왠지 모를 역겨움을 느꼈다.
당시의 내게 마흔은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서만 존재해야 할 책임이 있는 나이로 느껴졌다.
마흔 정도가 그렇게 느껴졌으니 그 이상의 나이는 말해 무엇하랴.
숫자가 말하는 지표만큼 나이에 따라 몸도 마음도 당연히 그렇게 노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믿을 때였다.

그런 내가 지금 마흔을 넘어버렸다.
그때의 아줌마들을 바싹 따라가는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때때로 거울 속 내 모습에 그 아줌마들의 잔상이 겹쳐지기도 한다.
사실 이쯤 되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뭔가 변신을 도모해야 할 상황이다.
아직은 젊어 보이려 하고 부끄러움을 간직한 여자이고 싶어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내 현실에 대해 너무도 쉽게 수긍하고 만다.
현실은 참으로 냉정하고 또 분명하기에....

아랫배를 잠시 내려다본다.
일이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늘어진 뱃살은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뱃살을 쥐면 한 줌 가득 손에 들어온다. 그야말로 고깃덩어리이다.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하다 보니 나잇살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스물의 앳된 아가씨의 눈에는 지금 내 모습이 그때 내가 본 아줌마들과 꼭 같은 모습으로 비쳐지리라.
어떤 분이 자신의 뱃살을 핸들이라고 하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던 이유를 이젠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도 어느새 남편에게 조금의 부끄럼도 긴장도 없이 늘어진 뱃살을 보여주는 여유를 부릴 만큼 넉살이 좋아진 것을...
웃으면 잡히는 자글자글한 눈가의 주름과 속상할 때 잡히는 양 미간의 내 천(川)자도 어느새 익숙해져서 그저 그러려니 아무렇지도 않게 시들시들한 마음이다.
그래, 다 바뀌는구나. 탄력 잃은 몸뚱어리처럼 팽팽하던 마음도 어느새 지치고 느슨해지는구나. 다행이다. 나이는 들어가고 몸도 추해져 가는데 마음만 젊다면 그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얼마나 가여운 일인가...
그래서 고단하고 지쳐 늙어버린 내 마음이 차라리 고마웠다.

그런데도 종종 희한한 감정들을 다시 만나곤 한다.
드라마를 보거나 감미로운 사랑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양 함께 절절한 사랑을 앓는 것이다. 지금 내게 사랑이란 감정에 떨릴 수 있는 감성이 남아 있을 리 없건만 나와는 참으로 무관한 저 한참 아래 세대의 사랑이야기에 내가 왜 이리 설레고 짜릿하고 그런지 참 주책 맞아 보인다.
극중 주인공이 중얼거렸다.
서른이면 가슴 두근거릴 일도 없고 누구 때문에 전화 기다릴 일도 없고 그럴 줄 알았다고...
정말 스무 살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흔이면 목석 같은 여자가 될줄 알았다. 오십이면 더 이상 여자이어선 안 되고 그 이후론 그저 할머니일 뿐이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할머니와 여자는... 전혀 다른 존재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 눈에 정말 추하게 보였던 한 할머니가 기억난다.
길을 걷다 얼핏 본 내 옆을 스쳐간 그녀는 분명 할머니였다.
그러나 방금 세팅한 듯 굽실거리는 긴 웨이브 머리에 하늘거리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뾰족한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차림새는 도무지 할머니의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홍등가의 여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뒤돌아보았다. 너무나도 어색한 그녀의 뒷모습에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늙으려면 고상하게 늙어가야지, 정말 저렇게 발악하듯 하는 모습은 추할 뿐이다.
내 젊음은 그렇게 노추(老醜)를 마음대로 비웃고 있었다.

최근에도 길을 걷다가 얼핏 스친 사람을 뒤돌아보는 경우가 있었다.
탱탱하게 물이 오른 몸으로 몸을 거의 다 드러내놓은 젊은 여성이었다.
예전같으면 너무 심하다 생각하며 민망해했겠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같은 여자인데도 그런 젊음 들을 보면 어찌나 건강하고 싱그러워 보이는지 보고 또 봐도 참으로 눈이 즐겁다.
젊음이란 것이 저렇게 눈부신 것이구나, 저렇게 황홀한 것이구나 하며 탄복한다.
그러나 그 마음 한 편으로 잠시 싸한 아픔이 지나간다.
동경 비슷한 야릇한 질투의 감정이다.
질투의 대상은 결코 젊음이 가진 육체적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 나이에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 때문이었다.
돌아보면 젊은 몸을 가진 날에도 내 마음은 그리 젊게 살지를 못했던 것 같다.
마치 세상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고통에 익숙한 사람처럼 그렇게 시간을 죽이며 살았다.
사실은 그것이 교만이었고 허세였다. 세상을 오히려 너무 몰랐던 것이고 세상을 겸손되게 사랑할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애착도 욕심도 없이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꾸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내 영혼을 그토록 지치게 만들었던가, 가끔은 자신이 답답하고 안쓰럽다.
무슨 일을 할 때 어울리는 나이가 있고 또 무슨 일을 해도 용서될 수 있는 나이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잣대에서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너그러워지고 있다.
마흔을 넘은 세월의 힘 덕분이다.

이젠 반라의 몸으로도 거침없이 길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성이나 자글자글한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뾰족구두를 신고 엉덩이를 흔드는 할머니나 내게는 다 아름다워 보인다.
눈에 보이는 젊음은 껍데기와 같다.
속에 차 있는 것이 삶에 대한 열정이고 사랑이라면 그것이 바로 젊음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다행히도 나는 점점 젊어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칠십에 사랑에 빠지는 할머니를 본다 해도 비웃지 않을 것 같다.
나의 마흔이 스물에 본 마흔여자의 그것이 아니듯 육십, 칠십의 여인 또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아니, 전혀 다르길 바라고 있는 마음이다.
그 나이가 예전에 알았던 색깔대로라면 남은 내 생이 너무도 칙칙할 것만 같다.
제대로 젊음을 꽃피워보지도 못한 채 시들기를 먼저 청했던 내 인생.
그러나 스물 나이에만 꿈을 가질 수 있고 스물 나이에만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은 아니리라.
부분적으로 많이 제한되긴 하겠지만 눈을 밝히면 문은 언제든지 열려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를 향해 속삭인다.

넌 뭐든지 할 수 있어.
널 믿어.
언제든 시작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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