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루지
가령 그대가 뾰루지였다고
그냥 단지 뾰루지였을 뿐이라고 쳐도
어쨌거나
작은 꽃망울 하나를 밀어 올리는 것도
봄이 오기 전부터 부지런히 물밑작업을 해야 하듯
그대와 나 또한
뾰루지가 앙증맞게 솟아오르기 전부터
보이지않는 그 뭔가를 서로 주고받지 않았겠나
그러니 그대, 내가 살을 뚫고 나오는 근질거림을
참지 못해 긁어버렸다고 원망하진 않겠지
몽우리만 만들어놓고 피지 못하는 것을 꽃이라 할 수 있나
발갗게 제 맘껏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제 시절 가면 허방으로 떨어지는 게 꽃이지
그대 곪을 대로 곪아
눈물 같은 진물까지 철철 흘렸으니
제대로 피었다 진 거 아닌가
아주 잠깐 살다 가는 꽃들도
나뭇가지 가지마다 저 살다온 자리는 있지
눈물 다 마른 자리에 꽃송이 떨어진 것처럼
보일 듯 말 듯 그대 있다 간 표시도 해두었으니
어찌 아름다웠다 말하지 못하겠나
-- 전유경 시집 <꽃잎처럼 흩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