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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단보도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며.>


BY 금빛 누리 2001-06-20

아직은 빨간불이다.
성급한 사람들은 벌써 횡단보도에 한 발을 내딛고 있다.
나는 그들 뒤에 몇발자국 떨어져 서서
아직은 내 몫이 아닌 봄을 기다린다.
길 건너편엔 바람이
쓸어 안은 세월의 무게에 휘청이며
오늘도 풀어야하는 인연의 실타래를
저 혼자 손끝 아프게 풀고 있다.

옆에 서있던 남자가 담배를 피워문다.
양손에 쇼핑빽을 든 여자가 찡그리며 남자 옆에서 비켜선다.
몇번의 헛기침을하며 남자는 기다림을 담배 연기로 날린다.
나는 기다림없이 다만 습관으로 신호등을 본다.

아직도 빨간불이다.
아득하다.
기다림조차없는 기다림은 정말 아득하다.
횡단보도 앞의 사람들은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달리기 선수처럼,
아니, 째깍거리는 초침처럼 시간을 갉아댄다.
나는 문득 거대한 아스팔트 정글속에 혼자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길이없다.아니, 길은 어디에도 있다.
다만 빨간불이 켜져 있을 뿐이다.

보도블럭위 여기저기에 누군가가 잃어버리고 간
오래된 기억과 기다림이 늙은 창부의 옷자락처럼
후줄그레하게 널브러져서 바람에 쓸린다.
바람이 우는것을 보았는가!
바람은 아주 가끔, 횡단보도 신호등 옆구리를 휘감으며
휘파람 소리로 운다.


파란불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길을 건너는데
나는 켜지지 않는 마음의 파란불을
기다림도없이 기다리며
이따금씩 바람만이 지나가는 횡단보도 앞에 지금도 서있다.
그냥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