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마우스를 가져간다. 하지만 누르지는 못한다. 혼자서는 절대 안 된다. 놈이 반대쪽 끝에서 웅크리고 앉아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 몸에 지닌 걸 빼앗기면 더는 생각도 욕구도 지닐 수가 없다. 놈에게 좋은 일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물론 그만한 무장을 해야 한다. 놈이 섣불리 달려들지 못할 무장. 그게 뭐일지 곰곰 생각해본다.
아주 나지막하게 누르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뫼는 깜짝 놀란다. 놈이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조용하다. 소리는 멈추어 있다. 잘못 들은 것은 아닌데 읊어대는 것은 안 하기로 한 모양이다. 주문을 외워대지 않는 건 다행이다.
다시 이균과 맞설 생각을 끌어당긴다. 손은 마우스 위에 얹힌 상태이다. 하지만 여전히 누르지는 않는다.
‘유전자정보를 바꾸면?’
하지만 자신이 없다.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
‘유전자를 건드릴 수 없게 감싼다면?’
하지만 방법을 찾는 게 쉽지 않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그래도 방법은 있을 거 같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려온다.
‘눌러! 눌러!······. 누르라고!’
잔뜩 숨죽인 소리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들려온다. 그는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모은다. 몸이 뭔가에 끌리는 느낌이 다가온다.
“안 돼!”
들이 뛰어오더니 뫼의 손을 마우스에서 떼어낸 후 그를 힘껏 끌어당긴다.
뫼는 술에 취한 듯 얼얼하다. 정신도 가물가물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고개를 사정없이 가로젓는다.
“놈의 주문에 걸려들었던 거지?”
“그래.”
“내가 힘껏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넌 끌려갔어. 널 혼자 두면 안 되겠어. 한데 너 혹시?”
“닫아둔 채 상대하는 건 미루는 것밖에 되지 않아.”
“그래서 맘을 놓을 수가 없어. 한데 소리가 어디서 들려왔어?”
“머릿속에서.”
“그럼 뇌세포에서야. 몸통과는 좀 다른 거 같아. 근질거리는 건 아니었잖아.”
“똑똑하군. 허긴, 유전자 주인이 머리가 보통이 아니었지. 나와 생각이 달라서 엇갈리긴 했지만. 그 여자 참 맘에 들었는데. 너처럼 말이야.”
이균이 참지 못하고 숨을 토해낸다.
들이 몸을 잔뜩 움츠린다. 팔에 소름이 쫙 돋아있다.
“나쁜 자식! 내 널 가만두지 않겠어. 아작을 낼지도 몰라. 그러니 섣불리 우릴 건드리지 마!”
들이 이를 바드득 간다. 그 소리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무섭군. 그 여자도 그랬지.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지. 걱정 마! 내 그 여잘 생각해서 너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한데 뫼? 뭘 그렇게 누르지 않고 꾸물거렸나? 그럼 지금쯤 니 몸속 유전자 정보가 내 손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왔을 텐데 말이야. 아쉽군. 들만 아니었으면 성공인데 말이야.”
들이 이번엔 몸을 툭툭 털어낸다.
“왜? 뭐가 묻었는데?”
“뭔가 잔뜩 들러붙은 느낌이야. 놈의 말 때문인 거 같아.”
“그것도 꼭 닮았군. 엇갈리기 전에 그 여자도 내가 말만 하면 그랬지. 몸을 툭툭 털어내면서 찝찝한 표정을 짓고는 쌩하니 달아나곤 했어. 좋아. 꿩 대신 닭이면 어때. 쫄깃한 맛은 덜해도 요리를 잘 해놓으면 맛이 기가 막힌데. 종류도 다양하고. 닭강정, 양념치킨, 통닭구이, 닭갈비,······. 내가 빠트리지 않고 다 헤아렸나 모르겠군.”
“난 닭 따윈 상관없으니까 사서 실컷 처 자셔! 누굴 보고 닭이래?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혹시 그 쪽이 유전자만 사람 것인 닭대가리 아냐? 그래서 맘보가 그렇게 삐틀어진 거 아냐? 혼자 처박혀서 가당찮은 생각만 붙들고 있는 것도 혹시 그 때문 아닌가? 남들 보기에 민망해서.”
들이 톡 쏘아붙인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휙 돌아서서 쏘아붙이는 것도 딱 그 여자군. 잊고 있었는데 널 대하고 있으니까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구만. 아, 눈앞에 삼삼해. 옆에 있으면 안아주고 싶은데.”
이균의 목소리가 한껏 감상에 젖어있다.
“그래? 한데 어쩌나? 옆에 없어서.”
“자네 웃고 있는 거 아냐? 입을 초승달을 만들면서 비위 거슬리게.’
“당연하지. 그 여자의 유전자를 받았는데 안 그러면 좀 이상하지 않겠어? 재수 없는 자식.”
“재수 없는 자식이라. 그건 좀 심하지 않나? 내가 유전자까지 좋은 걸로 골라서 넣어줬는데. 감사까지는 몰라도 그 말은 좀 지나치지 않냐고?”
“좀 그랬나? 이건 어때?”
“뭘 말인가?”
“이제 그만 꺼져주시지!”
“이이이······.”
이균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으르렁댄다. 들은 초승달 입을 하고 소리 없이 웃는다.
“어디서 그런 입담이 나오는 거야?”
“놈 말대로 내 안에 있는 유전자 주인이 똑똑했나봐. 거리낌 없이 나오던데? 아마 지금쯤 머리를 쥐어짜고 있지 않을까?”
뫼가 흐흐 웃는다.
“니가 있어서 안심이야. 한데 어떻게 다시 돌아왔어?”
들이 머뭇거린다.
“괜찮아. 니가 안 왔다면 난 여기 있지도 못할 텐데.”
“니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거 같았어. 그래서 있겠다고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어.”
“이젠 내 마음까지도 들여다보는 거야? 놈 말대로 무섭네? 가까이 가지 말아야겠어?”
뫼가 정말 무서운 것처럼 피하는 시늉을 한다.
“그래보든가.”
들은 심드렁하다. 뫼가 재미를 잃고 바로 제자리로 돌아온다.
“뫼, 너 대신 내가 열어보면 어떨까?”
들이 정색을 하고 말한다. 뫼의 장난기 어렸던 얼굴이 금세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알아. 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라도 그 생각을 할 테니까. 그래도 안 돼!”
“아냐. 내가 열어야 돼! 아주 짧게 스쳐간 생각인데, 내 유전자는 놈이 건드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놈이 안 건드리겠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야. 못 건드리는 거야. 놈은 그걸 돌려서 드러냈어.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그래.”
“어떤 근거로?”
“말할 때 놈의 목소리가 흔들리더라고. 여자를 꽤 좋아했던 거 같아. 그래서 건드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그건 니 생각일 뿐이야. 아닐 수도 있어. 아니면 어쩌려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겠지.”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너는? 너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건 있을 수 없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낮은 사람이 일을 떠맡는 건 당연해. 지금 상황에선 내가 가능성이 낮아.”
“그건 어디까지나 니 생각일 뿐이야.”
“맞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을 따르는 것도 용기야. 난 니가 그 용기를 내줬으면 해.”
“용기라는 말로 포장해서 들이밀지 마! 이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야. 그리고 놈이 노리는 건 나야.”
“그러니까. 적어도 놈이 날 노리지 않잖아.”
“노리지 않는다 해서 곱게 돌려보낸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그건 절대 안 돼!”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마! 너도 돌아올 거란 보장은 없어. 어차피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고집부리지 마! 널 떠밀 수는 없어.”
“떠미는 게 아니야. 내가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적어서 나서는 거야.”
“그 거나 그 거나.”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야. 놈은 날 건드리지 못해. 니가 아무리 뭐라 해도 그 생각은 흔들리지 않아.”
둘이 티격태격한다. 둘 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뫼는 들이 잘못 되기라도 할까봐 그게 걱정이다. 들은 이균이 자신만큼은 어쩌지 못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쓸데없는 걱정은 내려놔!”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야. 그 느낌을 니가 겪어보지 않아서 그래. 뼛속까지 서늘했다고. 그걸 너한테 겪게 할 수는 없어.”
“너만 겪은 게 아니야. 널 잡아당기는 나도 뼛속까지 서늘했어. 니 몸을 통해 나도 고스란히 느꼈어.”
들이 잡아당길 때의 느낌을 털어낸다.
“한데 왜 이제 말해?”
“왜이겠냐?”
들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난, 너는 못 느낀 줄 알았지. 그래도 안 돼!”
“그럼 이럼 되겠네? 내가 열고 들어갈 테니 니가 날 잡고 있어. 그러다 내가 소리 지르면 당기면 되잖아.”
“그러다 잘못 되기라도 하면?”
“나도 해냈어. 니가 못해내겠냐?”
들의 목소리가 똑 부러진다. 뫼가 우물우물한다. 들의 야무짐에 들이댈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들의 얼굴만 본다.
“괜찮을 거야. 나도 끌려가지 않았는데 니가 끌려가겠냐? 놈은 우릴 당해내지 못해. 우린 둘이고 젊어. 그러니 걱정은 버려!”
들의 말에 뫼는 아리송하다. 그럴 것도 같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래도 걱정을 말끔하게 걷어내지는 못한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하지만 들의 말도 빠져나가지 않고 머문다.
“정말 그럴까?”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들의 말도 그의 주저함을 확실히 밀어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