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는 얼른 화면 앞으로 가서 앉는다. 화면이 뿌옇다. 여자는 우산을 받쳐 쓰고 있다. 여자의 모습도 내리는 눈 때문에 또렷하지가 않다.
“누리! 니 말이 맞았어!”
눈이 내린다는 말에 다들 귀가 번쩍 뜨인다. 화면으로 달려와 고개를 들이민다. 대단한 거라도 찾아낸 듯 기뻐서 펄쩍펄쩍 뛰기까지 한다.
“눈이라는 거 참 아름답다. 여기도 눈이 내릴까?”
버들의 목소리가 달콤하다. 감상에 푹 젖은 목소리다.
“여기는 아냐? 눈이 내리기에는 너무 따뜻해.”
누리는 혼자만 알고 있다는 것이 그저 신이 나는 모양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또박또박 대꾸해준다. 그 말에 버들이 팍 풀이 죽는다. 누리와는 거꾸로 재미를 잃는다.
뫼는 누리도 버들도 안중에 없다. 여자만 따라가고 있다. 여자가 되풀이하는 삶이 뭔지 궁금하다. 여자는 왜 이 되풀이 되는 삶을 여기에 올려놨을까? 왜 하루의 모습이 아니라 산길을 들어서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모습만 보여주는 걸까? 생각은 늘 물음표로 끝이 난다. 눈길은 화면에 머물러 있다.
화면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다. 눈발이 성기다. 하지만 길은 이미 내린 눈으로 지난번처럼 하얗게 덮여간다.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국이 푹푹 들어가 있다. 또다시 여자가 나타난다. 여자는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을 일부러 골라 밟고 있다. 나름 재미가 있나 보다. 얼굴이 편안하다. 하지만 기운은 없어 보인다. 어디가 아픈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뭘 생각해?”
들이 툭 치며 말한다.
“여자, 여자가 이상해.”
“뭐가? 내 눈엔 멀쩡해 보이기만 한데. 너무 오래 보고 있어서 니가 이상해지는 건 아니야?”
들이 근심어린 눈빛을 보낸다. 이제 그만 화면 앞에서 일어나라는 뜻이다.
“밤이 오기 전에 배를 채워야지. 오늘은 여기서 멈추자! 그러다가 니가 탈나겠어.”
뫼는 들의 말을 무시하지 못한다. 끌리듯 화면 앞에서 몸을 떼어낸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여자로 가득하다. 여자의 몸이 생각과 따로 노는 것을 얼핏 엿본 것만 같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느낌일 뿐이다.
여섯이 한 줄로 서서 걸어간다. 옆엔 풀이 무성하다. 그는 슬쩍 들의 얼굴을 훔쳐본다. 두려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늘 오가는 길이 돼버린 지 오래다. 이젠 숲도 크게 겁내지 않는 듯하다. 숲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 단지 열매 때문은 아닌 듯하다. 더는 뱀 이야기도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숲속 깊이 들어가는 것은 탐탁지 않아 한다.
“배가 처음보다 빨리 고파지는 거 같지 않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시간은 어제보다 늦은 게 아닌데 배고픔은 갑절은 되는 거 같다. 뫼는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 사이 여자는 한쪽으로 비켜난다.
“같은 게 아니라 그래.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미가 툭 던진다. 그녀도 처음보다 배가 빨리 고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움직이고 있어서 그럴 거야. 움직이는 만큼 많이 먹어줘야 하거든.”
누리가 이미 겪어본 것처럼 말한다. 뫼는 누리의 말을 머릿속에 받아들인다. 그리고 또 다시 왜, 하고 묻는다. 하지만 직접 묻지는 않는다. 묻지 않았음에도 곧바로 누리가 말을 보탠다.
“우리 넷 중에 내가 맨 먼저 깨어났어. 처음 며칠은 나도 지금 니들과 같았어. 한데 날이 갈수록 먹는 양이 늘어나더라. 니들도 그걸 겪어내고 있는 거야.”
듣고 생각해보니 누리의 말이 틀리지 않다. 먹는 양이 처음보다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났다. 그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뫼는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많이 먹어 둬! 배고프면 밤에 깰 수도 있어.”
다들 열매를 따서 입으로 가져간다. 배부터 채운다. 그런 다음 열매를 따서 양손에 든다. 만약을 위한 것이다. 배도 채웠고, 양손에 열매도 따들었다. 미적거리지 않고 발길을 돌린다.
퍼뜩 여자가 떠오른다.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같은 행동을 자신들도 되풀이하고 있다. 어두워지면 잠을 자고 날이 밝으면 일어나 배고픔을 달래고, 화면 앞으로 가서 들여다보고. 하루하루가 비슷한 일들로 되풀이 되고 있다. 여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걸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건 아닌 거 같다. 하지만 뫼는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나름대로 간추려 본다. 살아낸다는 것은 되풀이하면서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에 들어서자 눈길을 걸어가는 여자가 보인다. 여자가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조심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여자가 걸어가는 길 위에 쌓였던 눈이 다져져 있다. 길이 아닌 곳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이 오고가서 다져진 곳을 빼고는 여전히 두께가 드러나게 눈이 쌓여 있다. 여자가 살아냈을 2013년이 묘하게 그의 마음을 울린다. 단지 산길을 오가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데 그에겐 그 모습이 안으로 깊이 잠겨든다. 왜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여자에게서 눈길을 떼어낸다. 만 년의 자기들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앞만 보고 걷고 있는 여자다. 여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도 기구들만 붙들고 씨름한다. 7987년 전에 살았다는 걸 빼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여자다. 한데도 무시할 수가 없다. 눈길이 저절로 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래도 억지로 떼어낸다.
이든과 누리, 들, 아미, 버들은 벌써 나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그새 또 여자와 마주하기라도 했어?”
이든이 안 봐도 훤하다는 투로 말한다.
“보려고 했던 건 아니고? 들어서는데 화면속의 여자가 눈에 들어오기에.”
뫼가 어물어물한다. 이든의 말 속에 묻어있는 느낌이 싫다. 여자에게 매여 사는 듯한 모습은 달갑지 않다.
“그게 그거지. 너 여자에게 제대로 꽂혔구나? 그 여자 나이가 제법 될 거 같던데? 여기로 오기 전이었다면 엄마뻘은 되겠더라.”
뫼의 속내와는 달리 이든은 장난스러움을 한껏 드러낸다. 뫼가 우물우물 한다. 뭐라 대꾸를 하고 싶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차라리 들이박기로 한다.
“니들은 궁금하지도 않냐? 왜 다른 모습은 다 잘라내고 늘 그 모습만 보이는지?”
“그 여자의 삶인가 보지? 누구에게나 삶은 있어? 그렇다고 그들의 삶에 다 참견하며 살 수는 없잖아?”
이든이 물러서지 않고 좁혀온다. 실실 웃기까지 한다. 뫼도 지고 싶지 않다.
“넘의 삶에 참견하는 게 아니라, 이 특별한 상황을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야. 그게 너보다 좀 더 강한 거뿐이고.”
이든이 씩 웃는다.
“알아. 그래도 밥 때는 챙겨가면서 하라는 뜻으로 던진 우스갯소리였어. 한데 뭘 그렇게 엉겨 붙어?”
“한데 왜 그렇게 실실 웃는데?”
“우습잖아? 우스갯소리에 우물우물하다가 머리 쭈뼛 세우고 다가오는 니가.”
뫼도 더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든의 말이 마음을 건드린다. 얼른 열매를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먹을 때만큼은 여자를 떼어내야지 한다. 한데 외려 여자는 더 달라붙는다. 열매를 집는 손놀림이 느려진다. 다시 여자에게 푹 빠져버리고 만다.
“정말 2013년에 살았던 여자일까?”
물이 틈새로 새어 나오 듯 머릿속에 머물고 있던 말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그야 모르지. 니가 알아봐! 난 그 여자 별로거든. 차라리 숲이라면 몰라도.”
뫼가 움찔한다. 이든한테 한 방 맞아놓고 누리에게 제대로 또한 방을 얻어맞는다. 아프지는 않지만 마음은 쓰인다.
“나 아무래도 병적이지?”
들이 뫼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건 아니야. 당연한 거야. 니가 말한 특별한 상황, 솔직히 나도 그게 마음이 쓰여.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아마 너도 그런 거 같아. 그래서 여자를 놓지 못하는 거야. 그 여자와 끈이 닿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 니 말이 맞아! 바로 그거야.”
뫼가 들의 말에 잃었던 힘을 얻는다.
“난 알고 싶어. 그걸 알아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 같아. 뭘 해도 성에 차지도 않을 거 같고. 난 내가 누구였는지, 왜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 누가 우리를 이곳으로 보냈는지, 그런 것들을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어. 밥을 먹을 때도 잠들기 전에도 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어. 들, 너도 이런 게 알고 싶은 거지?”
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뫼, 넌 끈질긴 데가 있어. 아무래도 난 덜 됐나봐. 알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생각은 늘 다른 데서 놀길 원하는 걸 보면 말이야.”
이든이 미안함을 슬쩍 내비친다.
“그래도 이든 니가 나보단 나아. 난 그런 걸 생각하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겠어. 그래 생각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이렇게 태평하잖아. 지난 번 니들 이야기에 말려 잠깐 생각해본 게 내겐 다야. 누가, 왜, 하는 것은 내 머릿속엔 없어. 집어넣는다고 해도 돌아서면 빠져나가. 그렇지만 나도 알고 싶어. 뫼, 니가 알아내! 난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는 건 좀이 쑤셔서 못하겠어. 죽을 것만 같다고. 그래서 말인데, 난 내일은 숲에나 다녀올 거야. 뫼, 너는 물론 안 가겠지? 들, 이든, 아미, 버들 니들은? 니들은 어때? 숲에 한 번 가보고 싶지 않아?”
숲이라는 말에 뫼의 몸이 꿈틀한다. 하지만 바로 가라앉는다. 화면에서 여자를 만나기 전이라면 기꺼이 따라나서고도 남을 마음이다. 여자가 그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지 그 마음이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누리의 눈길이 천천히 움직인다. 뫼가 있는 곳은 가볍게 건너뛴다.
들은 누리의 눈길이 다가오기 무섭게 진저리를 친다. 버들과 아미도 마찬가지다. 이든만이 알 듯 말 듯한 얼굴을 한다.
“이든, 너는 가는 거지? 남자라면 숲에 다녀오는 건 기본 아니야? 들, 아미, 버들 니들은 내가 봐줄게. 누군지 몰라도 설마 여기에 남자만 보냈겠어? 여자도 함께 보냈겠지.”
누리가 제멋대로 제치고 끌어들이고 한다. 뫼는 잠자코 있다. 이든은 뫼의 눈치를 본다. 가고 싶은데 주고받은 말이 걸린다.
“내 눈치 안 봐도 돼. 난 누리 말대로 가자고 해도 못 가. 니들끼리 다녀와.”
이든이 누리에게 눈짓을 하며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누리는 함께 갈 짝을 찾아서인지 목소리에 흥이 잔뜩 올라 있다. 눈치 따위는 마음 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