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마음은 서늘하다. 2013년을 생각에서 빼낼 수가 없다. 마치 2013년에 발을 담그고 1만 년을 살아내고 있는 것만 같다. 생각의 한쪽 끝이 저절로 그 쪽으로 움직여간다.
“그때 봤던 별들이 지금 보이는 저 별들일까?”
아미도 버들에게 물이 들어간다. 들은 눈가가 촉촉이 젖어 옴을 느낀다.
‘2013년, 어떤 세상일까? 그곳에선 어떤 모습으로 살아냈을까? 어떤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을까?’
버들과 아미의 말끝을 잘라내지 못하고 그녀 역시 2013년으로 뼈져든다. 꼭 회귀본능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다.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갈까? 아니면, 그냥 여기 머물까?’
닥치지 않아서 딱 잘라 이거라고 말하기가 그렇다. 그럼에도 2013년을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다. 1만 년, 지금도 내던질 수 있을 만큼 가볍지가 않다. 한데 생각은 당연하다는 듯 1만 년에서 2013년까지 7987년의 깊이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달빛에 은은하게 드러난 아미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만난 지 며칠이 지나고 있을 뿐이다. 한데 낯설지가 않다. 아주 오래 보아온 사람들처럼 벽이 느껴지지 않는다.
“2013년, 그리고 1만 년.”
들은 달빛에 기대 아미와 버들을 본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서 만난다.
“우리, 여기 말고 다른 데서 만난 적이 있을까?”
들이 뜬금없는 것을 묻는다. 아미와 버들이 어리둥절 한다. 들의 물음이 너무 진지하다. 장난기는 하나도 없다.
“2013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억울해?”
아미가 들의 마음을 읽어낸 듯 묻는다.
“너는?”
“모르겠어. 지금 내 마음이 뭔지 알 수가 없어. 돌아가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억울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골고루 섞인 것인지. 아무튼 홀가분하지는 않아. 니들도 그런 거지? 니들도 그런 거 아냐?”
“어떻게 안 그러겠어. 깨어나 보니 1만 년이라는데, 그것도 7987년 동안 잠을 잤다는데, 기억도 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니야?”
버들이 처방전을 써내려가듯 말한다. 아미도, 들도 버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내고 있지만 결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하지만 말은 없다. 입은 닫힌 채 열리지 않는다. 길게 침묵이 이어진다.
“내일 아침은 우리가 숲에 가볼까? 뫼와 이든, 누리가 우리를 위해 이 뜰을 만들어줬으니 우리도 뭔가 해줘야 할 거 아냐.”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버들이 먼저 입을 떼다. 그렇게라도 무거움을 툭툭 털어내고 싶다.
“그래.”
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러려면 우리도 들어가자!”
아미가 일어나 엉덩이를 털어내며 말한다.
눈꺼풀에 어둠이 쌓이고 육안이 닫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다들 7987년이나 자서 원도 없을 거 같은 잠속으로 몸을 들이민 채 움직임이 없다.
어둠을 털어내고 뫼가 잠에서 깬다. 뫼는 일어나자마자 창밖을 내다본다. 밖은 훤하다.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내린다. 눈이 부시다. 다들 일어날 시간이다. 그는 모두에게 인터폰을 한다.
들과 버들, 아미는 받지 않는다. 셋은 숲에서 딴 열매를 가득 안고 막 뜰에 들어서고 있다. 그들은 뜰에 아침상을 마련한다. 넓적한 풀잎에 열매들이 종류별로 그득그득 쌓아놓는다. 버들이 뫼와 이든, 누리를 불러낸다. 셋의 눈이 동그래진다.
“웬 일이야? 무서워서 안 가겠다고 버티더니.”
뫼가 믿기지 않는 눈빛을 담아 묻는다.
“웬 일은? 니들이 뜰을 만들어 줬으니까 우리는 아침을 챙긴 거지.”
들이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무서워서 어떻게?”
“뼛속까지 숨어든 그 놈의 용기를 끌어냈어. 이젠 돌려보내지 않을 거야. 꼭 붙들고 놔주지 않겠다고. 그래도 숲에 가는 건 사양이야.”
들이 마지막 말을 다부지게 쏟아낸다. 꼭 그런 것처럼, 꼭 그렇게 할 것처럼.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꼭 그래라.”
뫼가 함박웃음을 웃는다. 들이 스스로 나서서 숲에 갔다 왔다는 게 그냥 고맙다. 들도 피식 웃는다.
말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웃음소리도 말소리와 뒤섞여 낭자하다. 다들 2013년과 1만 년은 잠시 생각에서 내려놓는다. 조촐하지만 함께 나눠먹는 아침이 그저 행복하다. 아침으로 차려진 열매들이 이내 비워진다. 다들 뒤로 몸을 젖히고 맘껏 행복에 젖는다.
젖혀진 얼굴 위로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시리도록 푸르다. 새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다. 드넓은 하늘이 저 혼자 뽐내고 있다. 뫼가 웃음을 거둔다. 1만 년이다. 까닭도 모른 채 2013년에서 7987년을 건너뛰어 이곳에 와 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생각이 다시 비집고 들어온다. 아리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살살 건드리고 있는 거 같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 바람에 다들 웃음을 거둔다. 뒤로 젖혀져 있던 몸이 제자리로 돌아들 온다. 그런 다음 그를 올려다본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이 낯설다는 눈빛이다.
“왜?”
이든이 까닭을 묻는다.
뫼는 멋쩍다. 미안하기도 하다. 모처럼 주어진, 맘껏 기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것을 자신이 앗아버렸다.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주저앉는다. 다들 눈길을 거두지도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다.
“다시 그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어. 미안해, 나 때문에.”
모두의 표정이 무거워진다. 그 생각, 그게 모두의 머릿속을 채운다.
“빌어먹을 2013년, 7987년.”
누리가 주먹을 꽉 움켜쥔다. 어디라도 한 대 후려칠 기세다.
“1만 년에 내던져놨으면 2013년도 7987년도 깡그리 잊게 해주든가. 뭐가 이리 찌질해? 끊임없이 질겅질겅 씹게나 만들어놓고.”
누리가 꾹 참고 있던 분을 드러낸다.
뫼는 고개를 푹 숙인다. 현재를 즐기겠다는 누리를 끌어들인 것은 자신이다. 2013년과 7987년을 움켜쥐고 놓지 못하는 것도 자신이다. 웃고 떠들다가고 제일 먼저 분위기를 망가뜨리는 것도 자신이다. 자신의 운명에 애꿎은 누리를 엮어 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가온다. 씁쓸하다.
“찾아보자! 뫼만이 아니야. 나도 그 생각을 잘라낼 수가 없어. 잘라내려고 꾹 참아봤지만 소용이 없었어. 현실을 받아들이려 애를 써도 안 돼. 몸은 1만 년을 살고 있는데 머리는 2013년과 7987년을 오락가락하고 있어. 끊임없이 누가? 왜?, 그 물음만을 되풀이하고 있고. 아무리 밀어내도 소용이 없는 걸 보면 이것도 우리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젠 밀어내지 않을래. 찾아 나설 거야. 이게 내 현실이라면 그걸 밀어내는 것도 현실을 외면하는 거야. 찾아볼래. 찾아보면 이 찝찝한 생각에서 빠져나갈 길이 보일 거야. 이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을 던져버릴 길이 어딘가에는 틀림없이 있을 거야.”
들이 그동안 머릿속에만 담아두었던 생각을 길게 드러낸다. 다들 입을 꾹 다문다. 할 말이 없다. 들의 말이 모두의 마음을 두들겨댄다. 누리도 들의 말에 울컥하던 분을 내려놓는다. 뫼나 들, 아미처럼 억울하지 않았다. 2013년도 7987년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래서 원망 같은 것도 없었다. 그것들을 끈질기게 손에 쥐고 내려놓지 못하는 뫼와 들, 아미 때문에 화가 났다. 그래서 애꿎은 2013년에, 7987년에 분풀이를 했다. 뫼나 아미를 겨냥할 수가 없었다. 한데 들이 2013년 때문에, 7987년 때문에 아파하고 있다. 분하고 억울하다고 말했으면 차라리 홀가분하게 외면했을 거 같다. 가슴이 먹먹하니 아리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래. 들 말대로 틀림없이 어딘가에 길은 있을 거야. 그 길이 보일 때까지 멈추지 말고 찾아보자! 적어도 우린 혼자가 아니야. 여섯이나 있다고. 그래서 이 아침이 행복했던 거 아니야?”
뫼가 들의 말을 지지하고 나선다.
“알았어. 난 니들 뜻에 따를게.”
누리가 2013년과 7987년을 주워들고 입안에서 살살 굴려본다. 착 달라붙지 않는다. 서걱거린다. 발밑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지나간 과거이기에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기억에 없기에 발자국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데 돌아보니 발자국이 너무 선명하다. 마음이 이상하다. 아리다. 마음이 아린 것은 그도 비켜갈 수가 없다. 허허벌판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 같은 막막함도 다가온다. 여섯이 함께 있다고 해서 존재의 아픔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고스란히 느껴진다. 몸속에는 2013년의 흔적이 남아있다. 말도 2013년까지 써왔던 말일 게 틀림없다. 생각도 2013년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게다. 7987년 전의 흔적을 몸에 지닌 채 1만 년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도 그걸 받아들인다. 뫼와 들처럼은 아니지만 둘의 마음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다.
“나도. 그래도 오늘 이 아침 같은 즐거움은 매일 나누자! 난 너무 즐거웠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온몸으로 느껴본 것이 처음인 것처럼 말이야.”
이든이 잠시의 즐거움으로 끝난 게 영 섭섭한 모양이다. 많이 아쉬운 얼굴이다. 뫼는 다시 미안해진다. 그는 손을 뻗어 이든의 어깨에 올린다.
“괜찮아. 나도 알아.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거. 그 생각이 늘 우리를 괴롭힐 거라는 것도. 그래서 찾아내야 한다는 것도. 분위기 망쳤다고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 미안해하지는 마!”
이든이 뫼를 보며 씩 웃는다. 뫼도 웃어넘긴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2013년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