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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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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6

겨울방학이 되고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하루하루가 고역인 혜란으로선 그날이라고 딱히 별다를 게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런저런 계획으로 분주했을 정아도 이번에는 잠잠했다. 그때 마침 지원이가 크리스마스이브 때 디스코텍에 가자고 전화를 해 왔다. 비용은 자기가 다 쏜다고 했다. 침울하던 정아의 얼굴이 모처럼 환해졌다.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자 지원이는 갑자기 회식이 잡혔다며 약속을 취소했다.

“도대체 걔는 우리를 뭘로 보는 거야? 지가 필요하면 아무 때나 부르고, 필요 없으면 언제든 버려도 되는 껌인 줄 아나?”

정아는 화가 나서 방방 뛰었다. 혜란이도 정아의 말에 맞장구는 쳤으나 냉정하게 따져 보면 지원이가 그렇게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었다. 신입 사원이 회식을 거부하기는 어려울 테니까.

지원이는 정말 미안하다며 송년회는 꼭 함께 보내자고 다시 전화를 해 왔다.

“됐다 그래.”

정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냥 만나자. 솔직히 우리끼리 할 일도 없잖아?”

혜란은 정아를 달랬다.

“있어.”

“뭔데?”

“실은 나, 며칠 있다 서울로 떠나.”

“서울? 왜?”

“방학 전에 홍보 나왔던 H전자 있잖아, 거기나 갈까 싶어.”

“뭐?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니? 너 그동안 아무런 말도 안 했잖아?”

“사실 어제까지도 결정을 못 내린 상태였어. 그래서 말 안 한 거고.”

“그럼 이젠 결정을 내렸다는 거야?”

정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혜란은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하니 정아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야, 내가 뭐 어디 죽으러 가냐? 표정이 왜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축하나 해 줘.”

정아가 장난스럽게 요구했지만 혜란의 입에선 축하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아를 떠나보내고 혜란은 독감에 걸렸다.

난생 처음 앓는 독감처럼 증상은 혹독했다. 혜란은 너무 아파서 울고, 정아가 그리워서 또 울었다. 새해 첫 달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런데 독감은 서서히 진정돼 갔지만 정아에 대한 그리움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처음엔 일시적인 감정이려니 했다. 아프면 누구나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니까. 그런데 갈수록 상태는 심각했다. 혜란은 무슨 상사병에라도 걸린 것 같은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편하고 만만하기만 했던 정아를 그렇게까지 좋아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거짓말처럼 정아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는 어떤 미친년이 한밤중에 전화질이냐고 툴툴대며 전화를 바꿔 주었다.

“혜란아! 잘 있었어? 나야!”

정아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고 힘이 넘쳤다.

“정아야, 어떻게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했어?”

“나 지금 T시에 도착했어. 여기 터미널이야.”

“뭐? 회사는 어떡하고?”

“그 빌어먹을 회사야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지. 짐 싸 들고 아예 내려왔어.”

“진짜?”

혜란은 환호성을 질렀다. 옆에서 잔뜩 벼르고 있던 엄마는 갑자기 살아난 혜란의 모습에 놀랐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혜란은 단숨에 티파니로 달려 나갔다. 겨우 3주 못 봤을 뿐인데 한 30년은 떨어졌던 것처럼 정아가 반가웠다. 정아는 한 마디로 H전자에 사기를 당했다고 씩씩거렸다. 월급, 수당, 근무 환경, 기숙사 시설 등 모든 것이 얘기 듣던 것과는 딴판이었고, 실망도 실망이지만 도저히 속은 기분으로는 일할 수 없어서 보따리를 쌌다고 했다.

혜란은 H전자 홍보 담당자가 각 교실을 돌며 지원자를 모을 때 너무 달변가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생산직 일이란 게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화려한 시설이 다가 아닌데, 그 사람은 지나치게 달콤한 말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과장됐을 거라는 짐작은 했지만 정아의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인 데다 교장의 허락을 받고 학교에서 직접 한 설명회인데도 그렇게 말이 다르다면, 나머지 소규모 회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리하여 재회의 기쁨도 잠시뿐, 두 사람은 다시 예전처럼 긴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떨어져 있었던 걸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혜란은 매일 정아를 만나러 나갔다. 주로 정오쯤 티파니에서 만나 해질 무렵에 헤어졌지만 가끔은 밤까지 죽치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근처 시장에서 떡볶이 같은 걸로 끼니를 때우고 다시 티파니로 갔다. 저녁에는 공부든 일이든 각자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오는 사람들이 많아 시끌벅적 활기가 넘쳤다. 혜란은 퇴근 후의 여유를 맘껏 즐기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끔 티파니가 지겨우면 두 프로를 동시 상영 하는 소극장엘 갔다. 외화와 방화를 묶어서 보여 줬는데, 방화는 대개 낯 뜨거운 성인물일 때가 많았다. 혜란이 쭈뼛거리며 사람들 눈치를 보는 것과 달리 정아는 뻔뻔할 정도로 당당했다. 다리까지 착 꼬고 느긋하게 자세를 잡는 정아를 볼 때면 혜란은 정아보다 한참 어린 동생처럼 느껴졌다.

한번은 ‘더티 댄싱’이란 영화를 보게 됐는데 혜란은 마법처럼 그 영화에 중독이 돼 버렸다. 정아는 페트릭 스웨이즈의 섹시한 엉덩이에 홀딱 반했지만, 혜란이 감동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여주인공의 아버지였다. 자상하고 합리적이고 무엇보다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를 둔 그 여주인공이 어찌나 부럽던지 혜란은 영화를 연속 세 번이나 보았다.

이도저도 다 귀찮으면 무작정 걷기도 했다. 걷다가 공중전화를 만나면 가끔 지원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지원이는 상사가 있을 때면 잘못 걸려온 것처럼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처음 당할 땐 참 기분이 나빴지만, 상사한테 찍히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지원이의 변명을 듣고 이해하기로 했다. 반대로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면 지원이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목청을 높였다.

“아, 짜증나!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퇴근은 제때 해 본 적이 없어. 학원도 빨리 등록해야 되는데, 도대체가 짬을 낼 수가 없어. 니들이 정말 부럽다. 나도 놀고 싶어.”

“야, 네가 백수의 심정을 알기는 아냐?”

“아직 졸업도 안 했는데 백수는 무슨. 그냥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아.”

지원이는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고, 그건 혜란이나 정아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처지가 다르다는 게 그만큼 무서웠다.

길을 걷다가 이름이 예쁘거나 좀 특이하다 싶은 찻집이 나오면 들어가 보기도 했다. 어떤 곳은 출입문에서부터 자리까지 종업원이 깍듯하게 안내를 해 주었는데, 그럴 때면 우썩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몇 군데의 찻집을 둘러본 끝에 내린 결론은, 그래도 역시 티파니가 최고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우아하고 깔끔하고 종업원이 예의 발라도 티파니만큼 마음 편한 장소는 없었다. 사장은 하루 종일 가야 코빼기도 안 보이고, 알바생 두어 명이 설렁설렁 놀아가며 장사를 하는 티파니가 두 사람에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가고 비상금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시간과 돈을 그렇게 흥청망청 쓴다는 것은 예전의 혜란이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혜란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만약 티파니가 없었다면 어디를 어떻게 배회하고 다녔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