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주산 2급 자격증이 혜란의 손에 들어왔다.
혜란은 대한상공회의소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깟 종이 한 장 받자고 지금껏 고생했나 싶어 억울하면서도, 이제 더는 주산으로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 날아갈 듯 홀가분했다. 혜란은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자기도 세 번 만에 성공했으니 정우오빠도 이번에는 꼭 합격할 것 같았다.
정아는 합격을 축하하는 뜻에서 미팅을 주선하겠다고 하더니 일사천리로 일을 벌이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시험이 끝나면서 반 아이들 사이에선 미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혜란은 지원이가 가면 가고 아니면 안 간다고 버텼다. 한데 끄떡도 안 할 줄 알았던 지원이가 뜻밖에도 정아의 회유에 쉽게 넘어가 버렸다. 이유는 전에 영화를 보러 갈 때와 비슷했다. 학창 시절에 그런 경험도 한 번쯤 해 봐야 할 것 같다는.
그리하여 혜란과 지원이는 역사적인 첫 미팅을 하기 위해 다른 친구 두 명과 함께 정아 뒤를 줄레줄레 따라갔다. 미팅 장소에 이르렀을 때 혜란과 지원이는 동시에 눈이 커졌다. 지원이는 빵집이 아니라서 놀랐고, 혜란은 그곳이 전에 정우오빠랑 와 봤던 커피숍이어서 놀랐다. 정아의 발길이 G대 후문 근처로 향할 때부터 설마 했던 것이 정말로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티파니’라는 간판은 그때나 지금이나 혜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빨랑빨랑 따라와! 뒤처지지 말고.”
나무 계단을 내려가던 정아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둘은 후다닥 정아의 꽁무니로 따라붙었다. 실내는 낮인데도 어두웠고 공기는 탁했다. 정아는 구석자리로 성큼성큼 가더니 차례로 들어가 앉으라고 했다. 칸막이에 가려져 있어 몰랐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장정 한 명이 누워도 될 만큼 큰 탁자가 놓여 있었다. 남자애들은 벌써 와서 벽 쪽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앞에 한 명씩 앉으려니 영락없는 ‘짝짓기’ 같아 혜란은 기분이 찜찜했다.
정아는 초등 동창이라는 남자 쪽 주선자와 스스럼없이 얘기를 주고받으며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는 친구들을 소개시켰다. 남자애들도 한 명씩 자기소개를 했다. 하지만 음악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 데다 다들 모기만한 소리로 우물거려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파트너를 정하자는 얘기가 나왔지만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어찌나 수줍어하고 어색해하는지 그냥 흐지부지되었다. 그래도 바로 앞에 이성이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해서, 수수께끼 풀이 등 간단한 게임을 하거나 각자 자기 옆의 친구들과 잡담만 속닥대는데도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 와중에도 혜란의 신경은 남자애들 뒤의 벽에 걸려 있는 오드리 헵번의 사진에만 쏠려 있었다. 어둠침침한 조명이며 낡은 집기들이며 밋밋하고 썰렁하기 그지없는 실내 장식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벽 곳곳에 꾸며 놓은 영화 포스터며 오드리 헵번의 사진들 덕분이었다. 전에 그녀의 초상화를 그릴 때도 느꼈던 거지만 어쩜 그렇게 깜찍하고 청초하게 생겼는지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펑퍼짐한 자신은 죽었다 깨나도 그녀의 몸매나 이미지를 따라갈 수 없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첨엔 정우오빠가 좋아한다니까 무작정 좋아했는데 점점 혜란도 진정한 팬이 된 것이었다.
두세 시간 후 그곳을 나왔을 때, 기억에 남는 거라곤 담배 연기와 쓴 커피와 오드리 헵번뿐이었다.
“다시는 이런 데 오자고 하지 마!”
담배 연기 때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인상을 찌푸렸던 지원이는 남자애들과 헤어지자마자 정아한테 불만을 퍼부었다.
“야, 그래도 네가 제일 인기 많았잖아? 너 땜에 다른 애들은 다 쭉정이 됐고.”
정아가 곧바로 반격했다. 혜란은 쭉정이에 불과했음에도 정우오빠 때문에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혜란이 꼭 바람피우는 것 같았다고 하자 정아는 열녀 났다고 빈정댔다.
“한 사람만 열심히 좋아하는 게 비난받을 일이야?”
“아유, 그래. 둘이 세트로 열녀 났네.”
지원이가 혜란이 편을 드니까 정아는 두 팔을 번쩍 들며 항복했다. 지원이와 정아는 수시로 티격태격했지만 전에 살벌했던 분위기에 비하면 지금은 사랑싸움 수준이었다.
혜란은 정우오빠 이름만 나와도 간이 철렁하고 가슴이 벌렁거려 죽겠는데, 아무 걱정 없이 낄낄댈 수 있는 정아와 지원이가 부러웠다. 대입 시험을 앞두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혜란은 시험 이후의 하루하루를 엄청난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며 보내고 있었다. 결과는 둘째 치고 정우오빠가 이번 시험을 무사히 치렀는지 아닌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소정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겁이 나서 혜란이 먼저 연락해 볼 수도 없었다. 숨죽인 채 기다리는 것만이 혜란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