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은 오늘도 한 차례 전화를 받았다.
집주인의 전화였다.
"언제 돈 줄라꼬예? 그냥 갖다 주이소."
노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들리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주영은 사무적이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네 알겠어요. 저희 신랑이 갖다 드린다며 돈 가져 갔는데, 안 드렸나 봐요? 제가 신랑한테 그 돈 받아서 꼭 드릴게요 얼마였었죠?"
그 돈의 액수를 몰라서 묻는 주엉은 아니었다.
"내 알아봤다 아입니까? 10만 6천 7백원이라 카대예."
"네 10만 6천 7백원 이었군요. 꼭 드리러 갈 거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설마 저희가 그 돈 ㄸ데 먹을까봐 그러시는 건 아니죠?"
주영이 능청스럽게 물었다. 주영은 자신이 동욱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 거기 아이고, 잊어 뿌릿을까봐 전화 했다 아입니까? 꼭 갖다 주이소. 그래 알고 있었게예."
그 돈으로 설명하자면 길다.
주영은 복잡한 심사만큼이나 그 돈을 돌려주고 싶지 않다.
남편 동욱은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를 것이다.
그 때 주영의 마음 한편에 노인과 도혜옥이 슬그머니 발을 들여 놓았다.
"어리석은 짓이라예.
도혜옥이라면 주영에게 그렇게 말 했을 것이다.
제황산 공원 아래 다른 일반주택과 어둘리지 않는 모습으로 우뚝 솟은 절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날의 도혜옥은 빛이 났다.
"내가 새댁을 자꾸 찾는 일도 다 부질없는 짓일 낀데 오늘이 마지막 연일 거라예. 며칠 후에 주인양반이 있는 울진으로 가야지예, 오늘이 마지막이네예."
도혜옥이 그 말을 하며 작은 눈 가득히 웃음을 담고 있었다. 그 웃음은 그녀가 지난 5년 동안 겪었던 이 도시에서의 부질없는 자신의 직업, 자신의 삶에 대한 어리석음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도혜옥은 자신이 오랫동안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 한 적이 있었으며, 그 깨달음이 어느 순간 자신을 괴롭혔다고 말했다.
주영은 도혜옥을 그렇게까지 못살게 굴었던 깨달음의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알고 싶어 그녀와 한 번만 더 긴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주영은 그 마음을 이제 접어야 할 때라고 말하는 도혜옥과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영은 그만 자리를 떠날 시간이 되었음을. 이제 이 절 문 밖으로 한 발 내 딛는 그 순간 도혜옥과 자신의 연이 끊어질 것임을 알았다.
처음 도혜옥을 만난 그날 그녀의 공허한 눈을 보았던 것이 진실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 주영이었다. 도혜옥이 떠나는 그 일을 주영으로서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방안에 앉아 있던, 통이 넓은 회색바지를 입은 도혜옥은 그녀의 환한 웃음만큼이나 주영에게는 낯설었다. 그녀의 그 환한 웃음을 주영은 딱 한 번 보았다. 도혜옥이 점포정리를 할 때였다.
주영은 도혜옥이 정말 기가 막히게 맛이 좋을 거라는 중국차 반 봉지를 왼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영이 걸음을 몇 걸음 떼었다. 왼쪽 발목이 아팠다. 주영 자신도 모르게 왼쪽다리를 약간 끌었다. 여름이라 무릎 위로 올라 간 짧은 청반바지를 입은 주영의 왼쪽 발목에는 파란색 압박용 지압대가 발목을 감싸고 있다. 주영은 며칠 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아파트 계단으로 내려오다가 발목을 삐끗했었다.
정형외과에서 사진을 찍고 이상이 없었지만 발목의 통증은 계속 되었다. 그곳에서 며칠 치료 받다가 그날 주영은 한의원에 가 보려는 중이었다.
그날 아침 조금만 시간이 늦었다면 도혜옥과 통화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날 주영은 도혜옥을 만난 후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 나가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주영은 전화벨이 연달아 울릴 때 치료를 받기 위새 한의원으로 가려고 현관문을 막 밀고 있었던 그날 아침일이 지금은 우연만은 아닌 듯싶다. 도혜옥이 전화 저쪽에서 "한번 볼까예?" 그런 청을 해 왔다.
그날 돌아서 나오는 주영의 마음이, 마음이 뭐라 표현하기 힘들게 착잡했다. 그런 찰나에 도혜옥과 같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젊은 여승이 주영의 뒤에다 무심코 던진 듯 혹은 혼자 말인 듯 낮게 중얼거렸다.
" 그 발목이 당신의 업이 되겠어요."
주영은 미처 당신의 업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문을 닫았다. 몇 걸음을 떼었다. 마루 아래로 발을 내 딛는 주영의 뒤로 도혜옥과 여승의 눈길이 느껴진다.
절 모퉁이를 돌아서 나오는데 돌절구 모양의 그 안에 물과 함께 부레 옥잠 한 송이가 떠 있었다. 막 더워지기 시작할 시간이었지만 물빛만큼 그 날의 하늘은 맑았다.
주영이 지금 소파에서 바라보는 하늘 빛깔도 그날처럼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울진으로 떠난 도혜옥의 마음도 지금쯤 저 하늘 빛깔 같을 것이라고 주영은 생각하며 미소 짓는다.
<1편 끝>
*업:불교에서 전세에 지은 악행이나 선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서 받는 응보를 이르는 말, 갈마, 삼업;신업, 구업, 의업을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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