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드디어 디데이다. 오늘 준비 됐지?]
며칠전에 뜬금없이 전화해서는 남자친구 아직 없냐며 호들갑떨던 진준서.
고등학교때 미팅에서 만나 지금까지
사랑아닌 우정을 쌓아온 어떻게 보면 여자친구보다 더 나은 남자친구다.
진득한 면없고 끈기부족에 애인을 사귀어도 꼭 100일을 넘기지 못했으며
생긴건 멀쩡한데 비해 성격이 여성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 편이라 여자한테 늘 차인다.
그런 그가 갑자기 나한테 애인을 소개시켜주겠다고 난리다.
정작 나는 관심없는 애인에 그녀석이 28 평생 남자친구하나
제대로 사귀지 못해서야 어디 되겠냐며 혼자 난리굿이다.
누가 보면 시집못보낸 애닳은 아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꺼다.
[글쎄다 친구야. 난 늘 준비부족이잖니?]
-[됐다. 준비는 집어치우고 오늘 미리 얘기했으니 일단 나오너라. 밝은 태양도 좀 보고살지 않으련?]
[밝다 못해 피부암생기겠다. 필요없다는데 왜 자꾸 그래.]
살짝 높아진 언성때문인지 일하다말고 이선효군 고개든다. 내려. 응?
-[너 이거 말 안해줄라고 했는데 니 첫사랑처럼 생겼어.]
[내가 첫사랑이 어딨니]
역시나 늦은 오후 조용한 사무실에서 울리고 있는 내 목소리를
분명 지금 현재 졸고 있는 김과장님만 빼고 모두 듣고 있을것이다.
이미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전연정팀장이 움찔 반응이 왔다.
-[이것참. 내가 또 불어야겠네. 1996년 7월의 어느 커피숍에서 만났잖아.]
생각해보니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 미팅이었던 그 만남이 떠올랐다.
어른스러워보이자고 다른 친구가 매만져준 머리를 세팅 잘못됐다며
이것저것 문제 제기를 해대던 그 넘.
미용이 어떻구 피부가 어떻구 헤어스타일이 어떻구
장장 2시간 내내 입을 가만히 두지도 않던 넘.
[진준서. 너를 말하는거냐. 이 어이없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끄집어내는거냐?]
-[각설하자. 일단 중요한건 오늘 선이야.]
전화를 받으며 주위를 살피니
시선만 내게 옮기지 않았을뿐 귀가 이쪽을 향해 열려있는듯 보였다.
모두 끄적거리던 볼펜과 열심히 두들겨대던 자판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있는게 눈에 보인다.
[얼굴은 장동건과 원빈을 섞어놔야 하고 키는 정준호처럼 듬직하게 커야 하고
내가 안기면 들어올린채 한시간이고 몇시간이고 서 있을수 있는 괴물 같은 체력이어야
되는거 잊지 않았겠지?]
내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풋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늘 말하지만 그럴려면 에릭바나를 섭외해야 하는데 나 돈없어.]
지난 몇 년간 찾을수 없었던 나의이상형을 찾았다며 준서가 보여준 에릭바나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나왔던 배우다. 뭐 그정도면..근데 돈있으면 섭외는 가능한가?
[아니면 싫어.]
그러자 이선효군이 책상에 뭘 끄적이다 말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컴을 가리켰다.
바탕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전연정팀장이 되겠다는 각오로 보여요**
순간 욱하고 뭔가 밀려올라왔지만 난 무표정을 일관하려 애쓰면서 답메시지를 보냈다.
이사람의 능글능글페이스에 말리면 안된다.
**신경 꺼주세요**
-[내가 데리러 갈께. 호텔라운지로 잡아놓은거니까 괜찮잖아]
내 상황을 알리없는 진준서의 눈치없음에 깊은 애도를. 넌 만나면 죽었어.
이선효군은 나의 대꾸가 심히 마음에 걸린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자판을 두들겼다.
띵하고 뜬 메시지에는 내가 진준서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꼭 선보겠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말았다.
**늘어가는건 신경질뿐인 노처녀가 되는건 주위사람을 괴롭히는 짓이에요**
전화를 끊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고
노랠해도 결국 남자에 대한 갈망으로 몸부림치기를 좋아하는
전연정팀장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해주야. 선보냐?]
얼굴에는 너무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호들갑떨며 묻고 싶지는 않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줌마. 아줌마는 이런 남자들하곤 좀 거리가 멀어야 되는 사람 아니야?
[네. 친구가 선뵈준대요.]
[장동건이랑 원빈이랑 섞어졌대?]
킁하고 헛기침후 묻는걸 보니 정작 궁금했던 것은 이건가부다.
대답없이 시선을 돌리자 그 질문은 다른사람들도 궁금했던것인양
내쪽을 향해 고개가 돌려있었다. 앞자리 이선효군도 매우 궁금한 얼굴이다.
나한테 애인이 생기냐 안생기냐보다 전연정팀장이 시집을 가느냐 안가느냐가
더중요한 회사가 아니었던가?. 이 반응들은 뭐냐.
[네. 심하게 섞였다는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혜린이자리쪽에서 어머 부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히..힘은 괴물같다디?..]
부러움반 질투반섞인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 갑자기 전연정팀장이 안쓰러워졌다.
그리고 이렇게 튕겨대다가 나중에 저자리에 내가 서서 저 목소리를 낼꺼라 생각하니
갑자기 진준서의 전화가 고마워진다.
[네.앉았다일어서기도 몇시간이고 할수 있다네요.]
[세상에 그런남자가 어딨습니까]
딴지걸줄 알았다. 잠자코 동태를 살피는가 싶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툭 내뱉는다.
[있다고 하잖아요. 이대리님.]
차마 너라고 말못하는걸 다행으로 여겨!!
내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선효군의 입에서는 계속 되지도않은말이 흘러나온다.
[말도 안돼. 어떻게 쌀 몇가마를 지고 앉았다 일어섰다 그것도 몇시간이고 합니까?
뼈 아작낼일 있어요? 허리에 무리가 가서 아마 결혼생활 지장생길껄요?]
남이사. 결혼생활에 지장이 생기던 말던 무슨 상관이셔.
난 다시 정색으로 돌아와 능글맞은 미소를 날리는 이선효군에게 쏘아붙였다.
[신경써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일좀 하게 해주세요]
이쯤되면 내성질 더 이상 못건드린다 판단하는 일반사람들은 입을 다물게 마련이다.
[올해안에 국수먹겠네요. 이상형이 생겨서.]
뭐 다른 사람들은 이런말도 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 이선효군이 나한테 관심좀 있어서 그러는가보다 하겠지만
사실 이선효군과 나는 절대 친하지 않은 사이다.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난 사이라고 해야 정답이다.
[네. 보시다시피. 곧 청첩장 날릴께요]
최대한 입술을 이죽거리고 대꾸해야 이선효군이 입을 다문다.
나에게 찬바람이 돌고 있다는 침묵의 기류가 흐르자
혜린이도 팀장도 이대리도 모두 침묵상태로 돌입하기 시작한다. 그래. 이 분위기야.
난 이렇게 일을 해야 잘되는 내가 너무 좋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