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어지간히 취하셨었나봐요. 저한테 작업거시게.]
아침부터 숙취로 괴로워하며
자리에 털썩 앉은 이선효군이 내말에 갑자기 얼굴을 구겼다.
그 표정은 그가 나에게 전화를 잘못했었다는것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그럼 그렇지.
[내가 머리가 어떻게 됐나봐요. 손가락이 삐꾸인가?]
애꿎은 검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빙그르르 웃는 이선효군.
나랑 나이가 똑같지만 나보다 입사년도가 빠른죄로 들어온지 3년만에 대리급이 됐다.
내가 첫출근했을 때 생기발랄해보이는 입사동기녀 혜린이와 이 부서에 들어섰는데
온갖 미사어구를 들이대며 혜린이를 추켜세우더니 결국 자기 옆자리로 앉히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아무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노처녀팀장의 앞자리로 굳혀졌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곳이 아무도 가고싶어하지 않는 자리라는 것을 몰랐지만
나는 연애를 하려고 회사를 온 것이 아니라고 자부하며
일만 열심히 하자고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노처녀 전연정팀장의 히스테리컬한 정신세계와
말도 안되는 환상속의 남자에 관한 수다를 들으며 내가 이 회사를 다녀야 되나
후회를 했던 몇 개월전도 기억이 난다.
아무튼 문제는 입사후 1년이 지나고 이선효군이 대리가 되자
내 맞은편자리 즉 나보다 더 전연정팀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션효군이 옮겼다는것에 있다.
대리가 된지 얼마 안되었을 때 나는 영업용전화임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받아대는 사적인전화통으로 인해
그가 생각보다 번갈아가며 만나는 여자들이 있는 인기인이라는것을 알게 됐다.
또한 애인이 없는 전연정팀장이 외로운 밤을 필두로 내세워
숱하게 회식자리를 만들어낼때마다 그가 얼큰히 취하면 취할수록
수없는 전화질에 술잔기울이는 횟수가 줄어든다는것도 알게 됐다.
그 빈도는 필름이 끊기겠다 싶은 4차쯤에 아주 잦아지곤 했었다..
어제는 일이 있어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며 회식에서 빠졌었는데
야밤 12시에 깊이 잠들어있는사이 이선효군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성공적인 회사생활을 위해 단한번도 회식자리에서 빠진적이 없던 나였기에
그에게서 전화를 받은건 내가 입사한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지금 시간이 몇시에요 대체.]
나는 낭떠러지끝에 걸려서 지금 막 고공낙하를 준비중이던 꿈속에서 펑 빠져나왔다.
곤한 잠속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비상해오는 기분은 매우 꾸리하지 않은가.
[에이~~잉 연해주씨.. 그렇게 섹시한 목소리로 전활 받으면 어떡합니까아~]
이미 취할대로 취해 넥타이는 이마에 둘러져있을것이고
와이셔츠는 반쯤 풀어헤쳐져있음을 단박에 알아챌수 있는 목소리의 이선효군이었다. 늘 그랬다.
[왜 전화한거에요? 이밤에.]
짜증은 뻗쳤지만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려고 노력했다.
이선효군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신경쓰고 싶지 않은 인간형이라 오해를 불러일으켜 싸움이 나면 곤란했다.
이렇게 인사불성이면 더더욱.
[아이~. 연해주씨 목소리들으려고 전화한거에요~ 내가 뭐 이유가 있어서 전화하나요~오?]
이인간이 지금 뭐라는거야.
[지금 몇신줄 알아요?]
슬금슬금 화가 뻗치는걸 참는중이야. 더 건드리지말라구.
[그래두 오늘 회식같이 못왔으니까아~ 나보다 일찍 집에 들어갔잖아요~오.
잠들어있는거 깨운걸 보니이~ 일찍 자는 착한 어린이네에~]
이선효군은 최대한 이 전화를 빨리 끊고 금방 잠들기위해 감고 있던 나의 눈을 뜨이게 했다
차마 핸드폰폴더를 거꾸로 꺾어 아작을 내지 못하는게 분하단 생각만 들었다.
이사람은 내가 오늘 일이 있어 집에 가봐야 한단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거야?
[저기요. 술 자셨으면 곱게 집으로 들어가세요. 아니면 다른사람한테 전화를 하시던지요]
[에에~.. 연해주씨 화났어요??.. 에이~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마요~오..]
제발..아름답게 미칠수는 없는거니..
[끊을께요. 끊는다구요]
[안돼요!! . 에이~이.. 왜 그래요.. 나랑 더 통화하지이~.. 목소리도 좋은데에..]
수화기 저편너머로 전연정팀장의 꽥꽥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잘못걸리면 안돼지.
[뭐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없음 끊는다구요]
이젠 좀이 아니라 아주 많이 짜증이 겹친다.
난 흥얼흥얼 뭐라고 뭐라고 해대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내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봤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그 흥얼거림은 어느새 꽥꽥댐으로 넘어가고
뒤에서 뭐라고 해대는지 주위에 사람이 있는건지 마구 웃어대더니 뚝 끊겨버렸다. 기막히네.
그렇게 내 잠을 다 깨워놓고 뜬눈으로 지새우게 한 이선효군은
지금 내눈앞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책망하고 있었다.
[원래 그렇게 취하면 아무데나 전화를 잘해요?]
회의실에서 나오던 전연정팀장이 방향을 바꿔 탕비실로 들어가는걸 보면서
난 앞자리에 고개를 푹 박고 있는 이선효군에게 물었다.
어제 이선효군이 나한테 전화했다는 사실하나만 보더라도
회사사람들에게 가쉽거리가 되기는 충분했고
게다가 전연정팀장의 없던 일까지 사실처럼 덧붙여 돌리기 좋아하는 성격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뭐라구요..?]
일하는줄 알았더니
고개박고 졸고 있었음을 이마에 역력히 드러내며
눈을 반쯤 감은 이선효군의 얼굴이 올라왔다.
[아무한테나 전화를 하냐구요 술취하면.]
덜떨어진사람처럼 잠시 침묵하더니
빙그르르 웃으며 기지개를 펴는 이선효군.
[네. 아무한테나 전화를 해요. 술취하면.]
말이나 못하면 니가 미울리가 있겠니.
등을 너무 쭉 펴서 등뒤 김과장님뒷통수를 툭 친 이선효군이
벌떡 일어나 90도 각도로 인사를 해댄다.
[그버릇 고쳐요. 대체 언제 그런버릇을 들인거에요? 아니면 내 번호를 지우던가]
회사전체라고 해봤자 17명이 전부인 우리 회사.
그들의 전화번호를 나도 저장했고 이선효군은 물론이거니와
며칠전에 들어온 신입사원도 내 번호를 등록해놓았을것이다.
이것역시 전연정팀장의 아이디어 아닌 아이디어였다.
비상연락망이라고 조그맣게 워드쳐서 지갑에 넣고다니면 필요할때마다
꺼내써야 하니 그 얼마나 번거로운 짓이냐는거다.
당장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해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원래 그런건 사생활침해범주에 속하는거지만 일단 동기부여가 비상연락망이니
두말없이 다들 등록해둔 상태였다.
나의 정색에 살짝 당황한듯한 표정인 이선효군.
[왜 그래요. 이 손가락이 삐꾸여서 그런거라니까요. 걱정마요. 이제 안그래요]
저기요 그렇다고 그렇게 팔을 붕붕거릴 필요는 있나요?
[뭘 안그래?]
손까지 휘휘저으며 절레거리는 이선효군의 행동은 확실한 오버질이였다.
그래서 탕비실에서 나와 자리로 오고 있던 전연정팀장의 눈에 딱 들어오고 말았다. 잘났다.
[아니에요. 뭘 잘못해가지구 연해주씨가 얘기해주던 참이었습니다.]
가만히 서서 나와 이선효군을 번갈아 바라보던 팀장은
이선효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역시나 오버인듯한 미소를 흘리며 내게 말했다.
[이야. 우리 연해주. 이제 대리한테 이말 저말 다해줄 짬빱됐다 이거지~]
아니.. 짬빱이 그렇다는게 아니고요.. 아니 잠깐.
어차피 얘랑 나랑 나이는 같은데 비록 그건 아니어도 할수 있는거 아닌가?.
난 곤란한 표정도 당황하는 눈빛도 보이지 않은채 다시 고개를 묻었다.
이럴때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게 상책이다.
[야. 이대리. 해주가 뭐라고 얘기하면 착 알아들어. 너 쟤 성격알지?.
쟤가 아니면 아닌거잖아. 안그래? 그치? 김과장? 안그러니? 혜린아?]
시작이다.
지난 1년간 껀수만 생기면 오버질을 해대는 전연정팀장의 시발점.
이사람 저사람 동의구하는 저 처절한 모습. 사람들이 얘기한다.
그래도 예전엔 광범위하게 사람들을 도마위에 올려놓더니
내가 입사한뒤로는 그런일이 줄어들었다고.
이유인즉슨 도마위에서 펄떡이는건 내가 입사한 이래 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의가 있는건 아니지만 좋은말도 한두번이라고 1년내내 서있었던 도마위를
이제 벗어나고만 싶다.
[우리 해주가 생각보다 성격이 있더라고. 어우~ 여자가 저래야지 그럼 그럼.
착한척하고 내숭떨며 남자품에 안겨있는 요즘 여자들. 재수없어.
우리 해주 닮아야지 그럼 그럼.~ 안그래? 이대리?]
이제 좀 내려놓으시지요.
한동안 이런저런 전팀장의 말에 끄덕끄덕 대꾸해주고
어정쩡한 포즈로 반응하던 사람들은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나로 인해
심하게 뻘줌해진 전팀장이 조용해질때까지 일도 못하고 있었다.
참 불쌍하다. 직장상사가 대체 뭐길래 저 노처녀 비위맞추느라 그러는거니.
본시 화면을 보고 워드를 치면 타수가 느려진다 말을 들어온 터라 한참 워드를 치면서
정신없이 훑어내려가고 있는데 앞에서 볼펜이 책상면으로 스윽 침범하더니 톡톡 두들겼다.
고개를 들어 이선효군을 보자 컴화면을 보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실수한건 없었나요?**
다시 이선효군을 보자 내눈을 피해 짐짓 심각한척 서류파일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일하는 척이냐.
**나를 다른 여자로 착각해서 한짓은 없었지만 술취한
직장상사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도 고개를 파묻고 더 열심히 자판을 두들겨댔다. 내 메시지에 헉하는 소리들린다.
원래 나이가 같다는걸 알게 되었을 때 서로 말까자고 참 어이없게 들이대던 이선효군.
무표정으로 일관하자 존대말어렵다고 한동안 말한마디 제대로 안걸더니 이제는 잘도 해댄다.
**내가 술만 마시면 전화하는 버릇이 있는거 알죠?**
얼굴은 붉은색으로 셔츠는 다 풀어헤쳐져서는
샤랑헤에~하며 히-웃는걸 말하는거라면 아주 확실하게 알고 있다.
난 고개를 살짝 틀어 이선효군을 쳐다보면서 무표정으로 대꾸해줬다.
[네. 아주 아주 잘알고 있어요]
뭐 의도한바는 아니지만 조용한 사무실이라 그런지 내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지만 당황한건 이선효군뿐. 난 절대 동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뭐야. 하면서 돌아봐댔지만 내가 반응이 없자
늘 그렇듯 냇물흐르듯 시간을 타고 그 당황스런 순간은 사라졌다
저런 인간은 그냥 조용히 대꾸하기보다는 이렇게라도 다신 말 못걸게 하는게 최고다.
지난 1년간 어이없는 상사들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생각해냈던 나만의 방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