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 화창한 봄날이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라 그런지 한 낮에는 조금만 걸어도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날이다.
주말이나 공휴일이 아닌 평일에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극장가에 나오니 새삼 백수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극장앞 돌의자에 앉아서 그 녀석을 기다리고 있다.
극장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참 풋풋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영화 본 것이 아마 서영이와 같이 본 코믹영화였던것 같다.
서영이는 학원 다닐때 만났던 친구다.
그때 나는 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포기하고 취업을 하는것이 더 나을것 같다는 생각에
디자인 학원에 일년 다녔었다.
- 그때만 해도 디자인계열이 유행이었다 -
하긴 그때 그 남자도 처음 만났다.
서영이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내인생은 서영이의 인생에 비하면 순탄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다.
어찌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철없는 인간이란 생각을 들게하는것이 서영이다.
지금은 착한남자 만나서 아들 낳고 산 지가 1년이 막 지났다.
서영이는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그남자들 때문에 많이 울었다.
남자 때문에 상처 받으면 마음을 닫아버리는것이 나라면
남자 떄문에 상처 받은걸 다른 남자에게 위안 받으려는것이 서영이었다.
그런 서영이를 남자들은 많이 이용했다.
당사자들은 뭐라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그렇다.
핸드폰시계를보니 20분이 막 지났다.
갑자기 화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지가 먼저 영화보자고 해놓고 왜 늦고 난리야..... 10분만 더 기다리다 가야지.'
맘속에서 10분만 더 를 외쳤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나를 힐끗거리는것 같았다.
오랜만에 시내한가운데 나와 멀뚱 앉아있는것이 적응이 잘 안되는것 같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석이었다.
"누나, 미안해요. 차가 좀 많이 막히네.
근데.... 다왔어요. 5븐만....."
다급하고 흥분된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내 귀로 흘러들었다.
성질이 막 났지만 참았다.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표는 끊었나? 내가 끊을까?"
라고 말했다.
"누나, 표 내가 예매했는데..... 어, 누나 보인다."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저 건너편 길에서 녀석이 손을 흔드는것이 보였다.
'창피하게 손은 왜 흔들어.'
극장안은 한산했다.
평일이라는 말이다.
드문 드문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짝을지어 앉아 있었다.
"사람도 없는데 아무데나 앉죠?"
"어, 그러지 뭐"
영화가 시작되고 끝날때까지 그녀석과 나는 아무말이 없었다.
주위는 너무 조용했다.
팝콘씹는 소리도 콜라 마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없는 탓이겠지.
영화가 끝나고나서 불이 켜지고 그녀석이 나에게 물었다.
"영화 재미없네. 재밌다 그러더니.......
누나, 영화 재미없었죠? 하여간 방송에서 떠드는건 믿을게 못된다니까."
혼자 몇마디를 더 중얼거리더니, 나를 한번 힐끔 쳐다봤다.
"밥 먹으러 가요. 우리"
그녀석의 손에 이끌려 극장을 빠져 나왔다.
여운이 남는 영화인건 분명했지만 솔직히 그다지 재밌는 영화는 아니었다.
잠이 오지 않을 않을 정도의 길고 조금은 지루한 영화였다.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석이 나에게 교외로 나갈것을 요구했다.
그 말을 하는 그녀석의 얼굴이 지는 노을에 비춰져 발그스름했다.
참,.......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가 너무 멀다는 핑계로 그녀석의 요구를 난 거절했다.
우리는 근처 파스타전문점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그녀석은 밥을 먹는 동안에도 가족얘기며 학교 다닐때 얘기, 결혼한 하나뿐인 누나얘기로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석의 수다가 듣기 싫지는 않았다.
"무슨남자가 말이 저렇게 많아, 그것도 밥먹는데....."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다가 말았다.
단지 얘기를 들으면서 질문을 하고 싶은데
좀 이상할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