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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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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남자


BY 초록색괴물 2006-05-12

시간은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간다.

벚꽃잎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듯 싶더니 벌써 온데 간데 없고 그 자리엔 파란 새잎들이

앞을 다투어 키재기를 하고 있다.

길거리 가로수로 심어논 은행나무의 어린 잎들이 봄바람에 간지름 타듯 하늘하늘 거린다.

나뭇잎이 떨어질 때 부는 바람에는 기침이 극성이었는데 나뭇잎이 돋을 때 부는 바람에는 마음이 극성이다.

괜히 창이 넓고 큰 찻집에서 향이 온몸을 감싸는 헤이즐넛 한잔을 시켜놓고 하루종일 아무생각없이 창밖만을 내다보고싶은 그런 봄날이다.

나이트클럽에서는 봄이라고 해서 특별한 변화는 없다.

단지 춤추러 온 사람들의 옷차림만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그즈음 새로 식구가 한명 들어왔다.

훤칠하게 큰 키가 보는 사람을 시원하게 했다.

"여자들이 많이 따르겠네, 나이트에서 일할려면 여자보기를 돌같이 해야된다."

큰이모가 인사말을 했다.

하긴 나이트클럽에서는 여자만 조심하면 별 문제 없긴 하다.

일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한번씩 보면 여기 나이트클럽에 즐기러 오는 여자들이 화끈해서인지,아니면 마음이 허 해서인지 여기 일하는 남자들한테 잘안기는것 같다.

그렇게 또 한명의 신입을 받고 나이트는 영업을 시작했다.

 

"누나는 결혼 안하나요?"

새벽 포장마차에서 해장국을 먹는데 새로 들어온 그녀석이 말을 걸었다.

하긴, 내나이 32살이니......

결혼을 빨리한 친구중 하나인 현지는 큰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말이다.

문득 현지가 잘 지내는지 그리웠다.

작년 까지만 해도 제법 전화통화를 했었는데....잘 살겠지.

결혼이라.... 그녀석말에 예전에 만났던 그남자 생각이 났다.

그남자와 나는 20이라는 풋풋한 나이에 만나서 5년을 사귀다가 끝냈다.

그 뒤로도 그남자는 나를 괴롭혔는데...

우리는 당연히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예쁘게 살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건 아무리 둘이서 약속을 하고 서로를 믿어도 안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5년여를 사귀다 헤어졌으니...말이다.

그때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로에게 데인듯이 한치의 여운이나 아쉬움 없이 남남으로 돌아섰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서 예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

아무말없이 씨익 웃었다.

딱히 할말도 없었지만 하기도 싫었다.

그녀석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작은이모와 천지배인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연신 얘기를 주고 받으며 낄낄거리기까지 했다.

괜히 머쓱한 분위기가 그녀석과 나사이에 흐르는것 같았다.

 

새벽 5시 30분

첫차를 타고 집에 오는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한 뒤 얼굴화장기만 대충 지우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질 않았다.

다시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속에 비친 내모습이 보였다.

'언제까지 이일을 해야할까?'

하는 물음이 내게 던져졌다.

갑자기 나도 남들처럼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생활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그녀석과 나는 좀처럼 친해지지 않았다.

내가 너무 선을 긋는것 같은 느낌에 문득,

'왜 이러지, 나혼자 괜히'.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참 헛웃음 나올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석이 좋다거나 그런것도 아닌데 더구나 그녀석이 "누나, 우리 한번 사겨볼래요?' 할 기세는 더더욱 아닌데 말이다.

하긴 그녀석이 싫지도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남자라는 존재를 미워하고 싫어해서인가 하는 개인진단도 내려보지만 역시 웃긴 일이었다.

그야말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 데....

그제서야 햇살이 비치는 창문너머로  도로를 힘차게 달리는 차소리가 나를 잠들게 한다.

나이트클럽과 내 작은방 청소를 끝내고 난 뒤마시는 진한 블랙커피 한잔은 오늘하루도 기분좋게 무사히 일할수 있을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무사히.....

나이트클럽에 오는 사람들은 다혈질이 많은것 같다.

술이 한잔 얼큰해지면 이 다혈질의 사람들은 시비를 건 뒤 꼭 싸운다.

그냥 멱살 정도만 잡고 끝내면 정말 아무일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정말 과격해지면 텔레비젼이나 영화에서 보는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무시무시한광경

이젠 어느정도 익숙해졌고 대처방법도 잘 알지만

예전에 두여자가 한남자를 사이에 두고 싸움이 났는데 숨이 턱턱 막히는것 같았다.

간혹 남자들이 싸우는것보다 여자들이 싸우는 것이 더 잔인할 때가 많다.

흔히들 머리끄댕이 잡고 할퀴고 물고 이런것은 애교였다.

이 두여자들은 병을 내리치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것이 격투기 선수들 같았다.

천지배인이 경찰을 불러서 두여자는 경찰서로 연행되고 겨우 나이트클럽은 진정을 찾았지만,  한동안 가슴이 콩닥거림을 멈출수가 없었다.

이 두여자는 도대체 이 한남자를 얼마나 사랑해서였는지, 아니면 단순히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의한 자존심대결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두여자가 격렬히 싸우다 경찰에 끌려갈때까지도 말리거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남의 일인양 양팔끼고 구경만하다가 경찰이 동행해 주기를  요청하자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뒤도 안돌아보고 나가버린 그 남자가 더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트클럽에서는 이런 싸움이 자주 벌어진다.

다만 그정도가 심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석이 내 곁으로 살짝 다가왔다.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주방을 가르켰다.

주방으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쮸뼛거리며 따라간 주방에는 작은이모와 천지배인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박수까지 쳐가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요? 뭐 재밌는 일 있나?"

작은 이모의 얼굴과 천지배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들의 웃는 얼굴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도 웃음을 머금었다.

"아니,  홍아.  천지배인 큰애가 지아빠보고 아빠는 회사를 왜 거꾸로 다니는데...그랬단다.남들 아빠처럼 회사 아침에 다니라고 요새 계속 떼쓰고 난리라네.

요즘 애들은 참 영악해.우리때는 그럼가보다 하고 살았는데 말이지....'"

작은 이모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었고 천지배인은 고민되는 얼굴로 변했다.

"좀 작작해라, 이모는."

"천지배인은 심각하겠구만, 그게 그래 재밌나?"

내가 핀잔을 주자 작은 이모는 나에게 눈을 한번 흘기드니 그 녀석에게 이상한 눈빛을 보냈다.

뭘까? 저 눈빛은....

 

그녀석이 흠흠 하며 목을 한번 가다듬더니

"누나, 내일 누나 비번 아니 쉬는날이죠 나도 월차냈는대.... 우리 영화나 보러 갈까요?"

어....

우리가 언제 친해졌지?

천지배인이 한마디 더 거들었다.

"홍, 좋겠다. 멋진 남자가 그것도 연하가 데이트 신청을 다하고, 땡 잡은것 아니가?"

하며 왠지 느물거리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것 같았다.

"그래 홍아, 집에서 바닥긁고 벽긁고 하루종일 뒹굴거리지말고 데이트해."

근데 이상하게도 성질내면서 펄펄 뒤고 싶지가 않았다.

왜 그런거였을까?

그녀석 얼굴울 쳐다봤다.

내가 그러자고 한것처럼 밝은 얼굴이었다.

순간 '뭐야'하는 생각과 함께 내맘과는 다른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일 머리하거가야돼, 예약해놨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횅하니 주방을 나와 내 작은 사무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궈버렸다.

가슴이 두근반 세근반 거렸다.

'왜이래 정말, 알수가 없네.'

밖에선 작은 이모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내귀에 울린다.

아, 이게 아닌데.... 머리는 무슨...'

근데 왜 나는 문을 잠궜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