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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일지12


BY 47521 2005-08-28

1996.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외박

병원에서는 (외박)이라는 치료법이 있는데, 환자가 외박을 하고 들어와서 병원생활에 잘 적응을 하면 퇴원날짜를 잡는다.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신년휴가 2일까지 9박10일을 두 딸과 함께 보내기 위해 외박 날짜를 잡았다. 남편과 아들은 연말연시 휴가를 캐나다 시댁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아직 난 남편과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25일날 그들이 떠나므로 나는 하루 친정에서 자고 아현동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환자들은 (나뭇꾼과 선녀)처럼 보호자가 옷을 갖고 오지 않으면 외출을 할 수가 없었다.나는 딸이 날개를 갖고 올 오후 2시를 기다렸다. 시간은 왜 이리 더디 가는 것일까?기다림을 잊으려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을 펼쳤다. 악 그 자체인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권총자살 하는 장면이었다.이 소설의  두 번째 주인공, 그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보다 훨씬 자의식을 긍정했지.  그러나  논리적 인물인 라스콜리니코프가 초인의 이론을 설정하고 살인 뒤에 마땅히 치뤄야 할 죄를 자인할 수 없듯이 정열적인 인물인 스비드리가일로프도 뼈속 깊이 철두철미한 악마일 수는 없었지.

나는 침대에서 독한 약기운에 정신없이 자고 있는 B의 벌린 입을 쳐다 보았다.B도 뼈속 깊이 악녀일 수는 없지. 대부분의 정신병자들 처럼 그녀의 환경이 그녀를 구렁텅이에 몰아 넣은 것이지.B는 C의 예언대로 외박해서 술을 먹고 누구와 싸웠는지 아니면 늙은 영감한테 얻어 터졌는지 눈두덩이가 밤탱이가 되어 돌아왔다. 외박의 핑계인 산부인과 치료도 물론하지 않았다고 나에게 실토했다.당연히 주치의는 약을 늘렸고 그 약기운에 B는 식사 때 빼넣고는 퍼질러서 잠만 잤다. 도스토예프스키는 D처럼 정신이 우울할 때 자주 발작하는 간질환자였고 도박중독자였다.

딸이 날개를 갖고 왔다. 석달 보름만의 세상공기는 신선했다. 병동은 커피를 마실 수가 없으므로 먼저 원두커피점에 갔다.프랑스 작가 타라레의 말을 빌리면 커피는 악마와 같이 검고 지옥과 같이 뜨겁고 천사와 같이 순수하며 키스처럼 달콤하다고 했지.발암물질까지 들어있다고 알려진 커피가 오히려 암예방에 도움이 되는 콜로로젠산등을 함유하고 있고 하루 서너잔까지는 심장병,암,성기능에 도움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병동에서 커피를 못마시는 이유를 나는 입원하자마자 알았다. 유리병에 담긴 커피와 사기로 된 커피잔이 병자들에게는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병원에 있는 사이 아현동 아파트 앞에 지하철 5호선이 친정엄마 아파트 앞에 7호선이 생겼다.

-보기 싫은 사람 안보려고 우선 이리로 온 거니?

친정엄마는 면회를 자주 오셨는데 어느날인가는 초겨울 오후의 잔디밭에서 사그러져가는 햇볕을 받으며 내가 말한 적이 있다.

-엄마! 나를 왜 낳았어?

-그럼 너는 왜 영아를 낳았니?

대답할 말을 잃고 나는 병실로 가려고 병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한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꺼억꺼억 울어제껴도 마음은 개운하지가 않았다.병실에 들어가기가 정말 그 날 따라 싫었다. 나는 병실에 들어가기 싫다고 어린애 처럼 엄마에게 떼를 쓰기 시작했다.

-병 고치러 들어 가는 건데 자영아 들어 가자,응

계단에서 만난 간호조무사가 어떻게 엄마가 더 가슴이 아프지 딸이 더 가슴이 아프겠냐고 반대현상이 벌어졌다고 놀리기에 할 수없이 병실로  내키지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파트 거실에 들어섰을 때의 난감함이란.바닥은 카페트 대신 여름 돗자리가 그대로 깔려 있었고 구석구석에는 먼지가 뭉치째 박혀 있었다.부랴부랴 대청소를 마친 후,카페트를 깔고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고 나서 시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없는 동안 주로 인스턴트 음식을 사 먹은 모양이었다.오랜만의 시장 나들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낯익었던 것에 대한 낯설음.모든 풍경이 새로워서 나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외박 닷새째 되는 날엔 로이얄(royal)형도 만났다. 밖에서 만나서 그런지 표정은 훨씬 밝아 보였다. 형은 육체가 한산해지면 정신이 권태로와 진다고 하면서 사무실 근무보다 탑승해서 승무원일을 주로 한다고 했다.형은 내가 운동권 출신이 마지막 카드로 위장입원하는 정신병동에 내가 입원했다는 사실을 너무  안타까와했다.

A에게는 남편이 면회올 때 마다 깜박 잊어 먹는다고 투정을 부린 먹고 싶은 오징어를, B에게는 술 대신에 오렌지쥬스를,C는 친정올케에 얹혀 살므로 눈치 보느라고 그런지 다 헤진 브라자와 펜티를 걸치고 있었는데 새 브라자와 펜티를,D는 노상 카세트 라디오 이어폰을 꽂고 사니까 성현의 고귀한 말씀이 담긴 (명상의 말씀)테이프를,E는 콜라중독자라  대신 귤을,내 손을 보고 분명히 달려들 55동 환자들을 위해서는 초코파이 5상자를 사 갖고 병동에 들어섰다.

간간히 독방에서 손발이 묶인 환자들의 비명소리가 내 가슴을 얼어붙게 했다.유리창 쇠창살 너머에는 교회 십자가 뒤로 저녁노을이 온 세상을 집어 삼킬 듯 불타오르고 있었다.

 

저녁노을 처럼

                       서정주

산 밑에 가면

산 골짜기는

나보고 푸른 안개야 되야

자최도 없이 스며들어 오라 하고

 

강 가에 가면

흐르는 물은

나보고 왼총 눈물이 되야

살구꽃 닢처럼 져오랴 한다.

 

그러나 나는 맨발을 씻고

먼저 이 봄의 풀밭을 밟겠다.

그리고 그 다음엔 딴데로 가겠다.

 

저,

산접동새 우는 나룻목 가에

선연히 타는 저녁 놀 처럼

그 다음에는 딴데로 가겠다.

 

                                       미당(未堂)미수록시

                                        (97 문학평론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