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장에 그 사람이 나타난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마침 점심시간인지라 돌아가겠다는 그를 붙잡고 가족과 함께
가까운 냉면집으로 향했습니다.
한 겨울에 먹는 차가운 냉면맛.
아버지는 악수하며
"허.. 이거 은행에서 이렇게 또 나와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하셨고,
언니는
"얘, 너는 왜 자꾸 그 남자직원 팔 잡아 다니고 그러니?
그럼 못 써. 불경스럽게.."
하며 눈치를 줬습니다.
그러거나말거나
뛸듯이 기쁜 제마음에 그날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마냥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단 몇시간이라도 그사람과 함께 있었고,
함께 식사를 했고,
우리 가족을 만났다는 것은
갑자기 그사람이 내 소유라도 된 냥
의기양양하고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언젠가는 펑 하고 터질 풍선같은 마음.
그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직원들 인사발령 때문이었는지,
직원회식이 있었습니다.
바쁘게 업무정리를 마치고 근처 식당에서
식사와 술 한 잔씩을 한 다음,
종로 3가 국일관 지하에 있던
다크호스라는 디스코텍에 가게 되었습니다.
어두침침한 실내를 짓누르는
휘엉번쩍한 조명,
다른 사람 음성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귀 따가운 음향,
사람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클럽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생전처음 들어와본 디스코텍이란 곳의 첫인상은
신기하다, 재미있어 보인다, 왠지 음침하고 이상하다
라는 복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지점 여직원들이 우루루 같이 와서,
지점 남자직원들도 많이 있어서 불안하지 않고
든든했습니다.
선배 여직원들은 얼른나와, 얼른와 하며
핸드백을 자리에 놓고 무대로 나가 깔깔거리며
몸을 흔들어댔습니다.
거기,
은행에서 젤 춤 잘추는 그 언니가 중앙에서
나 좀 보란듯이 조명을 받으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몸놀림,
섹시한 바디라인,
흐느적거리는 그녀와 음악은 마치 하나가 된 듯 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 주위를 뺑 둘러싸며 환호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춤을 잘 출 수 있을까?
자리에 앉아 멍한 눈으로 그녈 바라보던 나는,
그녀 옆에서 열심히 함께 춤을 추는 그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둘은 호흡이 딱딱 잘 맞는듯,
지극히 자연스럽고 좋아보였습니다.
부럽다......
춤을 어떻게 춰야 좋을지도 모르는 쑥맥에게
디스코텍은 사람을 주눅들게 했습니다.
뭐, 학교 다닐 때 공부는 하나도 안 하고 죽어라 춤만 췄나보지.
저 정도로 출라면 애지간히 놀러다녔을거야.
그 언니에 대해 나름대로 억측을 내리고는,
동기생 영미하고 같이 손잡고 무대에 나가
선배 언니들과 어울려 촌스럽기 짝이 없는
춤을 추었습니다.
처음엔 어색하고 이상하더니 음악에 맞춰
그럭저럭 엉덩이도 흔들고, 옆 사람하고 장난도 치다보니
춤을 춘다는 기분보다는 넓은 마당에서 음악 틀어놓고
논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놓이고, 웃음도 나고, 깔깔거리며
유쾌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신나는 음악이 점점 줄어들더니,
조명은 더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물 밀듯 무대에서 쭈욱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엉? 왜 그러지?
주위를 둘러보니 연인들끼리, 남녀끼리 짝을 맞춰
부루스를 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아!! 텔레비젼에서 보던 장면,,,ㅋㅋㅋ
당황한 마음에 얼른 자리로 내려오려는 순간,
"춤은 나한테 배워야지..."
하며 손을 잡아 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
하며 쳐다보니 뒤에 그사람이 빙긋 웃으며
"처음 부루스 배울 때는 오빠 같이 좋은 사람한테
배워야지.. 자, 일루 와봐."
그사람의 손을 잡는다는 것,
그사람의 품 안에 안겨본다는 것,
생각도 못한 일이었는데,
얼떨결에 음악에 맞춰 그사람과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몇번인가 발을 밟고,
몇번인가 스텝이 엉켰지만
그사람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을 그렇게
많은 여직원들이 쳐다보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