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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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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두드리는 소리


BY happygire 2004-08-12

 

20대...넘치는 혈기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어디에 쏟아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 때...

 

실감나진 않았지만 곧 사라질 것이 뻔한 이 젊음을 어떡해야 할까...

 

나이트를 밥먹듯이 다녀도 봤고, 어느학교 법대 누구라며

삐삐번호를 적어 명함같이 만든 종이를

여자들에게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

 

열심히 원나잇스탠드에 몰입하다가도,

"너, 나중에 판사될꺼야? 그럼 안에다 해도 돼."라며

웃는 모습을 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옷을 줏어입고 나왔던  20대의 나는

현실에 급급해 미래따윈 생각하기도 싫었었다...

아니...무서웠을까?...짱짱하던 선배들이 중늙은이가되어 나타나

"내 꼴날라. 조심해라."며 밥을 얻어먹고 돌아갈때 느끼는 심한 우울함을 

9시뉴스에 모모판사는..검사는..이라며 이름이 거론되는 선배들을 보며

애써 위로하며 다시 명함을 만들곤 했다.

 

나는 아닐꺼야... 30대의 나는 아닐꺼야...30대가 되면 나는...

못할것이 없을 것만 같았는데...벌써 서른이 되었다.

 

2평남짓 골방에서 낮에도 불을 켜야하고,

추운 바람이 칼날이 되어 들이치는 데,

서른의 나는 누워서 멍하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처음에는 사법고시를... 회계사를.. 세무사를 ..이젠

7급공무원 합격증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엔 9급을 쳐볼까....뇌까리면서....

 

20대의 나를 이 방으로 데리고 와

 "봐! 밤낮으로 여자들 꽁무니만 따라다니더니

서른살의 니 모습이다!"라고 하면 그때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때부터라도 정신을 차렸을까...

"오빠...키가 180이야? 어쩜...이렇게 잘생겼어? 법대다닌다며? "

 대놓고 덤벼들던 여자들을 마다할 수 있었을까?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화들짝 일어난다.

 

누굴까...또 울음을 목에 넣은 엄만가...

"네."

"..."

"여보세요?"
"저...정지우씨댁 아닌가요?"

"네, 전데요."

"야! 지우야! 너 아닌줄 알았어. 나 진영이야. 전진영."

"어? 어..."

"너 목소리가 왜 그래? 공부 너무 열심히하는 거 아냐?"

"진영이 니가 왠일이냐?"

"별일이지. 부탁할게 있어서. 좀 나올래?"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골방에 빛을 비추고,

그 빛이 내몸을 관통해 머리위로 솟구친다.

"어디로...?"

그 빛을 쫒아 골방을 나선다.

 

한낮의 커피전문점은 한산하다.

"어서오세요."라는 의례적인말이 휑하게 울려오고,

창밖을 보고 있는 그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앞까지 왔는데도 그녀 꼼짝않고 창밖만 보고 있다.

 

그녀의 눈꺼풀이 조금씩 떨리고,

마치 다리꺽인 새마냥 촛점없는 눈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급기야 물컵을 가지고 온 종업원까지 내 옆에 서선

뻘쭘히 나를 바라본다.

 

깨기 싫은 그녀의 시간..."진영아."

그녀는 황망히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어, 왔어?라는 그녀의 표정이 어색하게 밝아진다.

"커피 두잔요."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간다.

"뭐야? 내가 커피 마실 줄 어떻게 알았어?"

"너 커피귀신이쟎아. 원두만 봐도 콜롬비아다, 이디오피아다,

나 그때 첨 알았어. 이디오피아는 그저 난민들만 사는 나란줄 알았거든."

그녀가 날 알고 있다...?

"또?"

"또...뭐?"

"나에 대해서 뭐 또 아는 거 있어?"

"알지...큰키에 핸섬한 얼굴, 법대생이라는 무기로

여러여자 울리고 다녔던 정지우씨를

우리 써클에서 모르는 사람 있었겠어?"

"그래, 그래, 내 무덤을 내가 팠네."

커피가 왔다. 또 병이 도진다.

"담배펴도 되지? "

"커피향을 맡으면 담배가 날 유혹해."

뭐...?

"뭘놀래? 우리 그때 단체로 커피마시러 다녔었쟎아.

그때마다 니가 한말이었어. 독특해서 기억해."

뭔가...담배를 피우며 생각을 다잡아본다.

 

니코틴으로 뇌를 마비시키며 생각을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미련한 짓이지만...

"부탁한다는 게 뭐야?"
"너, 일러스트 도사지?"

"일러스트? 프로그램?"

"응. 그거 배우고 싶어서.

우리 학원생들에게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주고 싶거든."

"내가 일러스트 한다는 거 어떻게 알아?"

"너 4학년때인가? 명함을 멋지게 만들었길래 물어보니까

일러스트로 작업했다고 했쟎아.

 미대생이 그것도 모르냐고 타박할땐 언제고...가르쳐 줄 수 있지?

물론 레슨비는 낼께. 대신 학원에서 배우는 것 보다 더 빨리 가르쳐 줘야돼."

아직 생각을 다 정리 못했는데 담배가 다 되어간다.

 

마치 밤낮이 바뀌는 피오나공주처럼 전혀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나

나의 과거에 대해 조목조목 말하는 그녀에 대해 난...아는게 없다...

 

근데...개인교습을 부탁한다고?

아니, 그건 고시생에게 있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제읜데...

유...부...녀...다.

" 뭐야? 날 바라보는 그 눈빛?"

"어? 내가?"

"너 고시포기하고 탐정 공부하니? 내가 뭘 어쩐다고 했다구 그래?

공부에 방해되서 싫은 거라면..."

"아냐. 좋아. 장소는?

"우리 학원에서, 최신 기종의 컴퓨터 풀세트를 벌써 장만해 놨거든."

그녀의 해맑은 웃음을 보니 오히려 무안하다.

 

담배를 비벼끈다.

 

커피점을 나서며 계산서를 얼른 집어들었다.

사실,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여는 마음이 편친않은데...

"계산 맞습니다."라는 말이 들려온다.

어느새 계산서 안에 돈을 끼워넣었지?

 

유리문 넘어 서있는 그녀의 치마가 바람에 펄럭인다.

 

추운듯 어깨를 감싸안는 그녀의 모습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씽긋 웃는 모습이,

내 가슴으로 밀려온다.

 

유리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다행히 유리문을 밀며 새로운 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차린다.

"잘마셨다는 인사도 안해?"

그녀의 입술이 반짝인다.

"너, 참 예뻐졌다."

뜬금없는 내 말에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떠질쯤

엘레베이터가 선다.

 

그 안에 노부부가 맥없이 우릴 보고 섰다.

 

왜 그 말이 불쑥 튀어나왔을까....황당해하느라 어떻게

집으로 왔는 지 모르겠지만,

얼마전 동생이 선물한 티셔츠를 찾고

다리미질을 하느라 곧 잊는다.

 

그래, 지금의 일만 생각하는 거야...

 

내일부터 그녀를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