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잠시 내 시선을 의식하며, 고개를 돌린 채 물었다.
<15일에 은행에 가야해. 그날 대출이 가능하대 그리고....>
무언가 말을 더 하려는듯 입 한쪽 끝을 올렸지만, 아무런 댓구를 하지 않는 나를 한 번 쳐다
보고는 그냥 집을 나섰다.
철컥 소리에 이어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는 소리가 났다.
<빤히 보고 있는데, 문은 참 정성 스럽게도 잠그네.>
<밤에나 문단속 좀 잘하지...>
사실 남편은 밤에는 문 도 잠그지 않을때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내가 체크해야만 했다.
작은 아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고 있다.
금방 붙이다 만 씨트지가 거실 바닥에 널부러져 있지만, 왠지 손 대기가 싫다.
무슨 씨트지를 그만큼이나 썼냐고 핀잔을 주던 남편의 찌그러진 얼굴이 뇌리에서 지어지질
않는다. 잠시 멍한 시선을 의식하다 화장실 문을 쳐다 보았다. 썩어서 까맣게 보이던 문이
감쪽같다. 문 색깔 보다 약같 짙 긴 하지만 그런대로 어울린다. 새로선에다 길게 몇 줄 만
더 붙이면 이제 거의 표가 나지 않을 듯 싶다.
<엣따, 하는김에 마저 하자.>
내심으로 다짐을 하고 다시 가위로 10.5센티미터에 가깝게 선을 따라 오리기 시작했다.
몇차례 오리고 붙이고 해서 인지 손에 익은 느낌이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길이이다. 의자
를 놓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앞면에 네 줄 뒤면에 네 줄 모두 다 붙이려면 그래도 꽤 시
간이 걸릴 것이다. 이제는 가위가 잘 들지를 않는다. 씨트지를 오릴때 칼날에 묻은 약간의
본드때문이다. 손으로 본드를 떼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아이방에 들어가 다른 가위
를 골라와야 할 것 같다.
<에~에잉>
작은 아들은 꼭 일어날때도 표시를 낸다.
<대웅이 깼쪄?>
나도 모르게 나오는 유아발음이다. 걸어와 안기는 아이의 몸은 따끈하다. 토실한 허벅 다
리를 아프지 않게 주무른다. 느낌이 좋다.
<대웅이 맘마 먹을까? 우유 줄까?>
<우유 쭈쎄요.>
기다리던 대답이다. 우유를 주스컵에 따라 주고는 다시 씨트지를 오려 붙이기 시작한다. 아
이는 안아 달라고 땡깡을 부리지만, 그럴수는 없는 일이다. 눈에 불을 켜고 아이를 밀쳐 내
다 시피하며 일에 몰두하자, 30분이 채 되기도 전에 일이 끝났다.
<아! 정말 감쪽같다.>
감탄사가 입밖으로 튀어 나왔다.
<대웅아, 어때 예쁘지?>
댓구도 않은 채 아이는 텔레비젼만 쳐다보고 있다.
기저귀는 뺐는지 베란다에 널부러져 있고, 오줌이 방 바닥에 흥건하다. 오줌을 닦아내면서
도 화는 그다지 나지 않는다. 새 장판이라 걸레질 하기도 좋다. 좁은 화장실이라 세면기를
떼어 냈다. 사용하기가 훨신 수월해 졌다. 쭈그리고 앉아 씻고 빨고 해야 하지만, 그게 뭐
대수 인가? 내 집인데....물을 틀어 걸레에 비누칠을 하고 있는데, 쐐~에 하는 물 소리에 전
화벨이 섞여 들린다. 허둥지둥 고무장갑을 벗고, 아이방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6월15일 1차 재판에 미참석 하였으므로 경찰청에 가서......>
<이게 무슨 싯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그러나 중요한 순간엔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 들을 수 가 없다. 자세히 듣기를 원하면 1번
을 누르라고 한다.
내심 재판 어쩌고 저쩌고 하니 겁이 덜컥 나기도 하고 궁금 하기도 하다.
번호를 누르자, 50대인 듯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는 꼭 모 유명인사 여 변
호사의 목소리 같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그녀는 두 가지 죄명으로 카드 사기단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
다고 한다. 당황한 나는 나는 아니니까,
<누가요? 000 이요?>
나도 모르게 남편의 이름을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말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왠일이지? >
<이상하네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녀는 지난달 등기 어쩌고 하면서 그런일이 없었다면 경찰청에 가서 사실을 말하라고 한다.
<지금 전화 하신대는 어디인데요? > 하고 묻자,
그녀는 가정 법원이라고 말하고는 카드번호보다도 긴 경찰청 전화 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
리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사건번호도 함께 알려 주었다.
긴 한숨을 토해내며, 전화를 끈었다.
<아침에 거의 냉전 상태에서 출근을 했는데, 뭐라고 전화를 한담..... 할 수 없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의외로 침착했다. 어디서 온 전화냐고 물었다. 가정법원 이라고 말하자, 그럼 거기
에 전화해서 그런 사실이 있는가고 확인을 하라고 한다.
가정법원으로 전화를 하자, 어이 없다는 듯이
<전화 사기단이네요.> 그리고는
<음성 메세지로 오는 전화는 받지 말고, 그냥 끈으세요.>한다.
<오! 마이 갓>
이 아침에 이게 뮈슨 병고인고, 함지박으로 머리를 대개 얻어 맞은 기분이다. 단 5분 사이에
천국과 지옥을 넘나든 것 같다. 갑자기 시장기가 밀려 온다. 아이는 그새 조각난 시트지를
안방에 가지고 들어가 가위로 오리고 있다.
<대웅아, 맘마 먹자.> 밥 숟가락이 입안으로 들어 갈 때 마다, 한 웅큼씩 쌓였던 시름이 덜어 지는 느낌이다. 이러니 살이 찌지.
<여자여, 여자여,>
<그만 좀 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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