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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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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망


BY 주 일 향 2004-06-24

 

 

높은 시청률로 경쟁사의 월화 드라마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막을 내린 미니시리즈로 인해 스탭들은 모두 신바람난다는 표정으로 흥청거리는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쫑파티를 하는 서민호의 마음은 홀가분하면서도 허전했다.

매번 드라마가 끝나면 느끼는 감정이지만 이번에는 유독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듯 허탈했다. 아니 외로움이 갑자기 밀려왔다.

이제 막 떠오른 별처럼 신선하고 발랄한 신인 탤런트와 밀착된 연기를 하면서 민호는 신선한 즐거움을 한껏 누렸었다.

영화배우라는 직업을 통해 다양한 삶을 연기하다보면 드라마 속 인물에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성취감과 함께 허탈감이 찾아오곤 했다.

민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신인 탤런트 유미의 청순한 얼굴이 술을 먹어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고 평소 새침해보이고 도도해보이는 그녀의 이미지와는 달리 끈적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미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하늘같은 선배일 것이다.

처음 상대역을 맡고 연기를 시작했을때만 해도 부담을 느껴선지 자꾸 NG를 내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진짜 애인이라도 되는 양 민호 옆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신인이라서 감정정리가 잘 안되는 지도 모르겠다.

민호도 처음 연기를 할 때 그랬었다. 같이 일했던 선배 연기자에게 남모르게 연정을 품은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연기가 몸에 밴 지금은 동료 연기자들을 사심없이 대할 수 있어 편해졌다.

화려한 타이틀을 가진 미모의 여배우들 틈에서 지내다보니 민호는 오히려 소박함이 그리워질 때가 많았다.


모델이자 배우인 아내는 아기를 돌봐줄 시간이 늘 부족했기 때문에 지희가 백일이 지날무렵부터 베이비시터를 집으로 부르곤 했었다

베이비시터가 자주 바뀌어서 얼굴을 익힐 틈도 없었지만,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서연이라는 여자는 달랐다.

고정적으로 집에 왔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마주 대할 때마다 맑고 소박한 분위기가 늘 감싸고 있었고. 그녀만이 지닌 독특한 향기가 느껴지곤 했었다.

우연이었는지 운명이었는지는 몰라도 민호가 쉬는 날이면 그녀가 아기를 보러 오곤 했었다.

민호는 쉬는 날이 되면 은근히 그녀가 기다려지기까지 했고, 그녀의 얼굴을 보면 반갑고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연기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다음 날은 녹초가 되어 하루종일 잠에 빠져 지내야 하는데, 지희랑 놀아준다는 핑계로 그녀와 간간히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녀에게 마음이 무너졌던 것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던 날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민호의 마음을 단숨에 흔들어 놓았고 자신의 마음을 차압해 버렸다.

만일 그녀가 풀어주지 않는다면 영영 이대로 묶여 지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밤이 그녀와의 이별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그날 밤 그녀와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것도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솔직히 몇 번 마주쳤을 뿐이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을 뿐, 연인으로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끝이 나버렸고, 더구나 아내를 통하지 않고는 그녀와 만날 수 있는 명분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민호는 마음이 답답했다.

하루종일 그녀를 만날 이유를 찾느라 머리를 굴렸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럴수록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기가 힘들어졌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자신에게 찾아왔던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그 시간이 다시 한 번만 찾아와 주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