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은 골목 입구에서 민호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말했다.
주택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라 주차난이 심해서 잘못 들어서면 차를 빼는데 무척 애를 먹는 곳이었기에 복잡한 골목까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자신의 초라한 삶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늦은 밤인데도 바람을 쐬러 나온 아줌마들이 미니 슈퍼 앞 파라솔에 앉아 큰소리로 웃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 많이 늦었죠? 정말 죄송합니다.
서민호는 정중하게 사과를 했지만 얼굴빛은 부드러워 보였다.
-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 당연한 일인데요 뭘,
- 밤길인데 운전 조심하세요.
-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었는데..... 그럼,
말을 마친 뒤. 서민호는 약간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었다.
그의 표정은 처녀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시골 아이처럼 투박하면서도 정겹게 느껴졌다. 브라운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의 본 모습을 본 것 같아 서연은기분이 묘하게 좋아졌다.
차안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를 천천히 음미하듯 떠올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은근한 눈빛과 태도를 되새기며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이제 오는 거야?
- 응, 당신도 지금 오네, 회식했나봐?
- 그런데, 이 시간에 왜 서민호가 당신을 데려다주었지?
술을 마신 탓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그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 실은 나미애가 약속을 펑크 내는 바람에 버스를 놓쳐서 서 민호가 바래다 주었어.
- 그럼 나미애가 바래다주든지 해야지 왜 하필 서민호야?
- 나미애가 아니라 서민호가 바래다 줘서 화난거야?
- 그럼 밤늦게 외간 남자 차에서 자기 마누라가 내리는데 열 안받겠어?
- 화만 내지 말고 내 얘길 들어봐. 나미애 기다리고 있는데, 서민호가 먼저 왔구, 버스가 끊긴 것을 알고 바래다 준건데 뭐가 잘못 된거야?
- 정성이 뻗쳤군.
- 뭐라구? 당신 좀 심한 거 아냐?
- 당신도 그래 야밤에 남자가 차 태워준다고 덥석 타냐?
- 점점?
- 당장 그만 둬,
- 누구 맘대로?
벌겋게 상기된 남편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늦은 시간이라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지만 열어놓은 창문으로 누가 들을까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남편은 한참동안 씩씩거리다가 술기운에 지쳐 소파에 누운채 잠이 들었다.
서연은 보통때 같으면 깨워서 안방에서 재웠을테지만. 무작정 화를 내는 남편이 너무도 옹졸하고 못나 보여 혼자 분을 삭이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