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프다.
술을 먹으면 어김없이 다음날 배가 고파진다.
그래서 그런지, 일찍 일어났다.
<동전 지갑에 있는 동전이면 라면 하나는 충분하겠지~>
아뿔싸~ 동전지갑에 있는 동전이라곤 십원짜리만 가~득했다.
맞다, 십원짜리가 하도 많아서 동전 지갑에 모아두었었다…
다시 들어갔다 나오기도 귀찮고,
그렇다고 십원짜리를 세서 값을 치르자니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고…이를 어쩌지…
-선경씨도 여기 단골이죠?
요새는 낯익은 이 목소리가 잘 들린다.
-아, 정팀장님~
-아줌마, 오늘은 우유가 없네요~
우유가 많은데 그 사람이 우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게, 500ml가 다 팔렸지?
아줌마가 대답한다.
-술 마신 다음날은 항상 우유를 마시나 봐요?
-그런 셈이죠.
그가 1000ml 우유를 집어 들며 말한다.
-아, 그런데 선경씨는 모 사러 오셨어요? 콩나물?
저번날에 콩나물을 사가는 거 같던데…
<아… 화장 안 한 내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다급하게
뛰쳐나간 그날을 기억하고 있나 보다>
-아…네~ 근데 어제 저 실수하지 않았나요?
그렇다, 나 지금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술을 먹으면
필름이 자주 끊긴다. 기분 나쁘다.
정팀장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웃지도 않는다.
<에이~ 별 일, 없었겠지모…>
-아가씨는 무얼 사려고?
딴 생각에 빠져있는 내게, 아주머니가 물어보신다.
-아…그게…정팀장님 저, 천원만 빌려주실래요?
제가 깜박하고 지갑을 잘 못 가지고 나왔거든요…
-무얼 사시려고요?
난 무파마(라면) 한 개를 들었다.
-것보다, 우리 해장국 할래요?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30년 전통이라는, 아주 작고 낡은 식당에서
선지 해장국이라는 것을 먹었다.
우리 동네에 이런 맛있고 허름한 해장국집이 있는지
정말 몰랐었다.
-선경씬, 복덩이를 잡은거에요~
-네?
해장국 집에서 나오자마자 그가 내게 한 말이다.
눈이 똥그래져서 묻는 내게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팀장님, 무슨 말이에요?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그럼, 월요일날 보십시다~
그러곤 저벅저벅 앞만 보고 걸어간다.
정팀장이란 저 남자…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었더니 이젠, 졸립다.
그래도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 아침 드라마를 놓친다는 건
절대로 인정할 수가 없다.
텔레비전을 켜기 위해 리모컨을 찾았다.
커피를 마셔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을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고 싱크대 위 인스턴트 커피를
찾았다. 난 내리는 커피도 좋아하지만,
커피 두개에 설탕 세 개, 프림 네 개 그리고
물을 많이 부은 밀크 커피도 좋아한다.
다시 리모콘을 잡아서 채널을 돌렸다.
지난 주에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가 오늘은 재미가 없다.
커피를 가져왔다.
화장실에 가서 양치를 하고 싶었다.
<커피, 마시고 할까?>
하지만 지금 난 어떤 생각을 무척이나 회피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생각들로 애써 피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박선배와는 진작부터 만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보담 그는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서만 그를 좋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럼 어째서 그날 밤,
날 찾아와
그 티켓을 주고 간 걸까…내가 오해 한 걸까?
아니, 아니다.
그것보담 그는 박선배와 나란히 있었으며,
비오는 날, 그를 기다린 날 외면했다.
그게 중요한 사실이다.
월요일 아침이다.
그냥 빈둥빈둥, 애써 생각나는 그에 대한 생각을
지우며 어렵게 어제를 보냈다.
-선경아 주말에 모했니?
화영선배를 보니까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일요일을 아무와도 만나지 않고 외롭게 보낸 탓이었을까?
-선배, 너무 보고 싶었어~
-어머, 지지배 징그럽게…무슨 소리야~
난 절대로 이번 일은 화영선배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묻혀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너 그저께 잘 들어갔어?
<이게 또 무슨 소리야?>
-그저께 정팀장한테 전화가 왔었어~
너랑 술 한잔 했다면서?
난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짓고 선배를 쳐다보았다.
-너 데려다 줘야 하는데, 니네 집이 몇 호인지 가르쳐 달라고…
지지배 술, 무진장 먹었나바…
-어머, 그랬대?
화영선배에게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난 무척
찜찜하다…
정팀장이 없는 가운데 간단한 회의를 했다.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오늘 결근을 한단다.
회의를 끝내고 물어보았다.
-글쎄~ 아참, 정팀장이 너더러 전화 해 달라고 하던데?
-아, 그래요?
-촬영 때문에 그런가? 오늘 촬영 잡힌 날이야?
-응…그럼 모 어쩔 수 없이, 홍작가를 불러야 겠네?
난 그럴 수 없었다.
-안돼~
나의 단호한 모습에 선배가 놀란다.
-왜? 홍작가랑 하면 더 좋잖아~
정말, 곤란한 상황이다.
-어, 그게…선배, 일단 내가 정팀장님이랑 상의해 볼게~
나는 서둘러 내 자리로 피난왔다.
선배는 무언가 내게 묻고 싶어했지만 이내 그만두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 화영선배보다 더한 복병이 있었다는 걸
깜박했다.
아니, 토요일날 그런 상황만 없었다면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선경씨, 토요일날 영화는 잘 봤어요?
내 옆자리 순정씨가 물어본다.
난 순간 당황했다.
무어라 둘러대야 하는건지..
-아뇨, 못 봤어요~
순정씨 나 지금 급한 전화 한 통화 할께요….
그녀가 아주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정팀장에게 전화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이선경 입니다.
-아…선경씨, 내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오늘 촬영을
같이 못 할거 같은데…
-아, 그러세요? 그럼, 다른 날로 잡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데드라인에 못 맞추게 되거든요~
선경씨에겐 상당히 미안한데, 이번에도 홍작가랑
끝내 주셔야 겠습니다.
<도대체 이사람, 좋게 생각해야 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내일이나 모레 하면 되지 않을까요?
난 쫌 앙칼진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는 내게 상당히 미안한 듯 말한다.
제가 지금 개인적으로 곤란한 상황이라서요...
지금 이 일이 며칠 걸릴 것 같습니다.
도대체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내가 그를 만나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 걱정만이
내 머리속에 맴돌뿐이다.
전화를 끝내고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그리고 생각을 해야만 했다.
<어쩌지…그를 만나게 되면 난…어떡하지...
그냥 모른척하고 일만 하면 되는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되버린거야…정팀장, 그 사람, 정말…
순정씨가 날 흘끔 쳐다본다.
갑자기 잘 마시던 밀크커피가 지겨워졌다.
머그컵 하나 가득찬 밀크 커피를 다 버려버렸다.
그리곤 따뜻한 물에 녹차 티백 두개를 넣었다.
녹차는 녹차를 한 개 넣던 두개 넣던 간에,
그 본래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한데, 이 놈의 커피는 설탕만 넣으면 설탕 커피가 되고,
프림만 넣으면 프림 커피가 되고,
설탕 프림 다 넣으면 달짝찌근한 밀크 커피가 되고…
그리고 도대체, 영양가도 하나도 없잖아…
이런 커피가 모가 좋다고 맨날 마셨는지…
사랑에도 다양한 형태 없이
한가지로만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의 나처럼 이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잖아...
난 지금 커피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
도대체 사랑이란걸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변해 간다.
나라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