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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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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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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BY furndle 2004-01-04

아이는 벌써 어둠이 이끼처럼 달라붙은 처마아래서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겨울 발빠른 해가 꼬리를 내리기도 훨씬 전에 아이는 집에서 나왔다.

버스들이 얼기설기 늘어선 종점을 지나 나달나달 사람들의 발길에 되새김되어 만들어진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오면 그 곳에 늙수그레한 그 여자의 얼굴처럼 허물어질 듯 위태위태 서 있는 낡고 오랜 슬레이트 지붕이 있다. 아버지는 벌써 며칠째 이곳에서 밤낮을 보내고 있었다. 늘 불콰하게 술이 오른 아버지는 아이가 찾아가면 빨리 집에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막상 아버지가 무서워 대걸이를 하지못하고 아이는 몇 시간째 지금 문밖 어둑한 벽을 등지고 앉았다.꼭 아버지를 데리고 가야한다. 엄마의 거의 애원이다시피한 당부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는 그 여자가 구역질 나도록 싫었다. 그 여자와 함께 있는 아버지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기도 하였다. 예쁘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그 여자의 어디가 좋은 것인지 아버지는 그렇게 그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이제 기척도 나지 않았다. 아이는 더 이상 겨울밤 추위를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아이는 다시 일어나 문을 두드렸다. 쾅쾅. 한참을 두드렸을때 여자가 나왔다. 그여자의 입에서도 술냄새가 났다. 그 여자는 아이를 향해 냅다 소리질렀다. 

 "너거 아부지 여기 없다!" 
  " 벌써 갔다"

아이는 마지못해 돌아섰다. 돌아가는 길은 지팡이를 짚고가듯 더듬어야 했다. 이제 겨우 아홉살난 계집애가 다닥다닥 달라붙은 어둠을 떨치고 길을 찾아가기에 겨울 밤은 너무 깊고 찰흙처럼 질었다.

한편 어머니가 야속했다.

늘 아버지는 아이의 몫이었다. 술이 취해 들어오는 아버지를 당해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가 눈에 보이면 아버지는 다짜고짜 때릴려고 달려들었다.그런 날은 자정이 넘을때까지 던지고 때리고 싸우는 소리로 온 동네가 시끄러웠고 급기야 아이는 이웃한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달려가야 했다. 어쩌면 어머니가 죽어버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이는 부끄러움을 오래 앙물고 있을수가 없었다. 누구보다도 자존심이 강했던 아이였지만 그러나 한 밤을 찢는듯한 어머니의 비명소리를 혼자서 감당할 수가 없었던것이다.그리고 날이 훤하게 밝으면 아버지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술을 마시지 않을때의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성실했고 과묵했으나 정이 많았다. 명절날 늘 새옷과 새신발로 아이를 기쁘게 해주던 사람도 아버지였고 잘생긴 얼굴에 깔끔하게 양복차림을 하고 학교를 찾아와 아이의 선생님께 아이를 잘 부탁한다며 하얀봉투를 내밀던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깔끔하고 형편이 안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정많은 아버지가 술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왜 전혀 딴 사람이 되어버리는지 아이는 참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떠돌이 장꾼이었다. 할머니가 아버지를 임신했을때 할아버지는 떠돌이 봇짐장수가 되어 정처없이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해 할아버지는 소식이 끊어졌고 식구들은 그저 어딘가서 객사했거니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큰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젊은 날 역시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등짐을 지고 떠도는 봇짐장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큰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으셨고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큰형님마저 멀리 일본으로 떠나버리자  아버지는 어린 날 참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아버지의 눈물을 언젠가 한 번 아이는 본적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는 아버지가 싫지 않았다. 죽이고 싶도록 밉다가도 아버지가 좋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향길에 따라나섰던 것도 늘 아이였다.

 그렇게 어둠을 되짚어  어깨를 오들오들 떨면서 돌아오면 아이의 엄마는 한숨을 땅이 꺼져라 쉬면서 혼잣말을 되풀이 하였다. 그 많은 어른들의 말을 미리 알아버린 아홉살난 아이는 더 이상 아이로 있을 수만 없었다.

 아이게게 세상은 두려움이었다. 곁불쬐듯 늘 조마조마 가슴졸이며 눈치보며 살아야하는 덫이었다. 더이상 하얀 도화지에 푸른하늘을 마음껏 그려낼 수 없었다. 푸른 멍이 되어 가슴을 옭죄는 꺾인 새의 두 날개. 두근거림에  연약한 명줄을 달아놓고 아이는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