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주형이 돌아오자마자 가게 분위기가 담박에 바뀌어버렸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했던 그 무엇이 형의 무게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단골손님들은 너도 나도 형의 바텐에 앉으려고 나름대로 신경전을 벌였고 함께한 sunny누나도 훨씬 보기 좋았다.
처음 형을 만났을때 올해 40살이 된다던 형을, 두 살 어리게 봐준 대가로 용돈을 받은 적이있었는데 이제 정말로 형의 생일이 단 하루 남았다.
형의 집에 형이외세 사람이 온 게 나뿐이었다는 말이 조금은 거짓이었다는 게 그 밤 sunny누나가 술에 취해 온 그 후부터 알게 되었지만, 감히 그 둘을 한 액자안의 사진처럼 볼 수 없었던 건 형과 누나, 그리고 형친구의 아이 와의 다소 무거운 운명의 끈 때문이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막상 반지까지 은근히 괜한 일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복잡한 생각이 자꾸 신경을 건딜었다.
"병근아? 무슨 생각하니?"
누나가 같은 테이블만 수차례 닦고 있는 나의 손을 잡으며 물어왔다.
"생각은요… 그냥 …. 누나 혹시 뭐 시킬 거 있으세요?"
누나는 살짝 눈을 흘기며 테이블을 닦던 내 수건을 집어들며 말했다.
"병근이 너 요즘 변한 거 알아?"
"네?"
바텐위의 장식물의 먼지를 털며 누나는 날 돌아봤다.
"여자친구 생기더니 이제 이 노땅 누나한테는 관심이 아예 없나봐? 아이 서운해라. 미은이만 이뻐라하고. "
누나를 바라보니 뭔가 변한 건 내가 아니었다.
항상 긴 생머리를 질끈 묶어올렸던 누나의 머리가 굵은 웨이브의 퍼머 머리로 변해져 있었다.
"아, 알았다, 누나 헤어스타일 바꿨네요? 와, 무지 섹쉬하다."
"정말? 좀 어색하지 않니? 미은이가 하도 난리치면서 같이 미장원 가자고 해서 따라 갔었는데 넘어색하지 않아? 항상 생머리만 하다가 하니깐 난 좀 쑥스러운데..우리 병근이가 좋게 봐주니 기분은 좋은데?"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누나는 웃었다.
좀 낯설긴 했지만 늘 봐오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가 주변 사람에게도 신선한 기분을 주었다. 항상 생각하는거지만 누나는 뭘 해도 예쁠 사람이지만.
싱글거리는 내 앞으로 작은 미은이가 '휙'하고 지나갔다.
인사도 안하고 지나가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와인창고로 쏙 사라진 그 애의 뒤를 따라 나도 안으로 들어갔다.
"여우야? 어디 숨었어? 너 또 뭐땜에 그렇게 인사도 안하고 사라지는 거니? 좋은 말 할때 자수해라."
술병을 가득 쌓아논 박스 뒤에서 소리가 났다.
"칫, 누가 뭘 어쨌다고? 난 암것도 잘못 한 거 없다 뭐."
목소리가 한 톤 떨어져 있다는 건 뭔가 사고를 친게 틀림없다.
"그럼 나와봐. 뭐 땜에 그러는데? "
포옥 하고 한 숨 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터덜거리며 미은이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순간 난 내 눈을 가리고야 말았다.
화요일의 손님이었을 땐 늘 차분한 갈색머리였다가 우리 바에서 알바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 노란머리를 염색을 하고 나타났었던 미은이는 이번엔 온통 가을하늘의 석양마냥 붉은 색인지 오렌지색인지 모를 색깔의 머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눈을 가리고 있던 나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벌리며 어리광섞인 그 애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아이 오빠 화내지 마라, 이거 내가 하고 싶어서 한거 아니야, 써니언니 미용실 데리고 갈려고 내가 어쩔 수 없이 한 거라니까, 응? 느닷없이 난 머리 안할건데 언니만 머리 하라고 데리고 가면 이상하잖아, 안그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염색이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오빠 이해하지?"
간신히 눈을 떠서 미은이를 처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꼭 염색을 저런 색을 하고 싶을까 싶은 생각에 한 숨이 쉬어졌다.
"그래, 니 머리 마루타 삼아 희생해서 웅주형이랑 누나가 잘만 되다면 정말 잘 한 건데, 한 가지만 묻자? 너 그 머리하고 전철타고 다니는 거 신경안쓰이냐? 사람들이 다 너만 쳐다볼거 같다는 생각은 안해봤어?"
까르르 손벽을 치며 웃으면 미은이는 신나했다.
"어머머? 진짜? 진짜 그렇게 눈에 띄어? 야, 신난다. 난 사실 튀지않으면 어떻게 하나하고 고민했는데. 잘됬다."
"형이랑 누나땜에 어쩔 수 없이 한거라며? 튈라고 한거네, 그럼?"
조그만 입을 꼭 다물며 미은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에이, 오빠는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아저씨랑 언니땜에 한거라니까 , 절대 튈라고 한 거 아니고, 앗 손님 왔나보네? 오빠 나 가볼께."
웃어야지, 이미 불타는 고구마 색깔로 머리를 바꾼 것을 어쩌랴만은 어디까지 여자친구의 변신이 무죄인지는 나도 알 수 가 없었다.
오랜만에 칵테일의 달인으로 다시 제자리를 찾은 형의 모습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바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독일에서 가져온 홈메이드 쵸코렛이 서비스 안주로 각 테이블에 서빙이 되자 손님들이 여기저기서 번쩍하고 엄지를 들어 바에있는 형에게 인사를 했다.
살살 녹는 초코릿의 맛과 형의 다정한 목소리.
새로 머리모양을 바꾼 아름다운 누나에게서 난 집이란 것의 편안함을 느꼈다.
이곳은 집과는 멀리 떨어진, 그것도 술이라는 것을 파는 곳임에도 이 순간 내가 피부로 호흡하는 이 곳의 분위기는 집에 대한 데쟈뷰 같은 것이었다.
영업이 끝나고 정리를 하는 도중에 미은이가 글라스를 울리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주목해주세요. 내일은 우리 가게의 대장이자 가장 고령이신 웅주아저씨의 거룩한 40세 생신이신 것 다 아시죠? 가게에서 간단한 파티가 있을 예정이오니 기대하셔도 좋구요. 참, 우리 가게의 이미지 쇄신과 함께 생신기념이벤트로 전 직원이 다 하얀색으로 옷을 통일 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웅주아저씨 생일 선물은 각자 알아서…"
미은이가 마이크 삼아 들고 말했던 후추 통을 뺏어들더니 형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가 항상 말했지만 이런 거 하지말라고 했던거 다 알지요? 음…. 근데 하지 말라꼬 했더니 정말 아무도 생일 안찾아 주데? 미은이 니 말잘했다. 그 동안 생일 선물 안 주었던 것은 별도로 접수처를 마련할 테니 아무 부담없이 비싼 걸 로다 낼 선물 많이 부탁드립니다. 이상."
모두들 배를 잡고 웃는다.
무안해진 형의 임기응변이 나름대로 귀여웠으니 말이다.
가게 문을 닫고 지하철 타는 곳까지 바래다 주고 있는 내 어깨에 미은이가 살짝 머리를 기대왔다.
"오빠, 정말 아저씨랑 언니랑 행복해 졌으면 좋겠어. 그치?"
난 팔짱낀 팔을 풀러서 그 애의 어깨에 둘렀다.
미은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까 언니랑 머리하고 옷가게 들러서 하얀 원피스 사게 했어, 나도 웅주아저씨 생일때문에 하얀옷산다고 티셔츠랑 치마랑 사고 언니한테는 영계 흉내내지말고 원피스 사라고 해서 언니가 입어봤는데 정말 예뻤던 거 알아? 나 아무래도 웨딩플래너 해야 할까봐."
"너 컴 전공 다시 해보겠다며? 이제는 또 변한거야?"
옆구리를 미은이가 살짝 꼬집는다.
"계속 놀리기만 할거야? 난 그래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전철역 입구의 가로등이 밝게 빛났다.
늦은 시각이라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사랑스런 맘을 가진 나의 여자친구가 화가나서 입술을 내밀고 퉁퉁거리고 있었다.
난 그 애의 손을 잡았고 그애의 이마에 , 코에,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아무 말도 필요없이 그 순간에 미은이도 나도 서로의 맘을 알았다.
우리가 진정으로 형과 누나의 행복을 위해 애쓴다는 것을,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의 작은 사랑도 한 뼘 클 것을 말이다.
"이제 오빠 맘 알았지?"
쑥스러운지 미은이는 운동화 끝만 내려다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오빠가 집앞에 까지 데려다 줄게."
"싫어, 그럼 오빠 혼자 다시 여기까지 와야하잖아."
"괜찮아, 니 그 빨간 머리에 익숙해지려면 자꾸 보고 있어야 할 거 같아서야. 그 머리가 어디 한 번만에 누에 익을 색깔이니? "
이미 우리는 훈훈한 미소를 나누며 전철역 계단을 내려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