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이었다.
새로 짜온 고객관리 프로그램은 낭비되었던 많은 경로들을 줄여주었고 한결 관리하기가 쉬어졌다.
가게 식구들은 모두들 한 마디씩 했고 그간 컴에 만큼은 지존을 고수했던 내 자존심은 김빠진 맥주처럼 우스워졌다.
왠지모를 불안감 .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이 곳에서 마저 나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전공인 컴퓨터에서 밀렸다는 생각이 기분을 한 없이 가라앉게 한다
"병근아저씨도 솔직히 내가 짠게 더 낫죠?"
"이봐요. 왜 자꾸 아저씨라고 그래요? 내가 아줌마라고 그럼 좋아요?"
"어머? 괜히 신경질이야. 내가 어딜봐서 아줌마에요?"
"그럼 나는 어디가 아저씨에요?"
옆에 서있던 웨이터장 형이 그런다.
"거울봐봐, 너 나랑 친구먹어도 될 정도야?"
그간 일배우느라 웅주형에게서 인생을 배우느라 그저 깨끗하고 청결한 것 외에는 신경안쓰고 지난지 오래되었던건 사실이지만 30살이 넘은 웨이터 형이랑 같은 또래로 보이는 정도라니 어깨에 힘이 빠졌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자괴감에 빠져서 우울한 나에게 그애가 또 말을 건냈다
"내 소원들어줄거죠?"
"내가 왜 그 쪽 소원을 들어줘요. 혼자 좋아서 프로그램 짜와놓고, 형한테 얘기해요."
신경질적으로 돌아서는 내 소매를 그 애는 붙잡았다.
"웅주아저씨가 내 소원들어주래요."
"형이 그랬어요? 황당하구만., 도대체 뭔데 그래요? 소원이라는거?"
"병근아저씨랑 데이트하는거요. 웅주아저씨가 병근아저씨랑 나가서 놀다가 오래요"
찢어질대로 찢어진 눈을 하고 가게 식구들의 얼굴을 한 번 씩 바라보았지만 마치 아무일도 없다는 듯 다들 딴 전이고 더군다나 이 어처구니 없는 소원을 들어주라는 사람이 웅주형이라는게 영 화가 났다.
그래 까짓것 나가서 놀아보자 어디.
오랜만이었다.
늘 가게나 형의 도서관이 일과였던 나에게 한 낮의 햇살은 비타민처럼 느껴졌다.
이마에 송송 땀이 맺힐만큼 따사로운 느낌에 괜시리 기분이 둥둥 떠오르는 것 같았다.
여전히 긴 속눈썹에 노란 머리
일하러 나온지 2일만에 휴가를 받는 이 애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내 이름 모게요?"
"최미은이요."
"어머어머어머 어떻게 내이름 알아요?"
길을 걷다말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발을 동동 구르는 그애는… 햇빛 과 같다.
"지금 장난해요? 늘 와서 레인보우만 마셔놓구는, 고객관리 프로그램 잊었어요?"
나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조금은 머쓱한지 암말도 없다.
난 이런 시간과 상황에 늘 서툴었따. 신입생때 머리수를 맞추기 위해 나갔던 과팅에서도 난 슬그머니 먼저 나와버렸었다.
그리고 과에서 몇 안되는 여자동기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지났다.
이제사 그 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법을 배워놓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이미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거니와 사람과 사람사이에 그저 형식이 중요한 건 아닐거였다.
웅주형은 처음 부터 언제던 날짜를 정하던 부정기적이던 휴가를 주고 싶어앴지만 군대 시절에도 갈 곳을 알 수가 없었던 나에게 지금도 별반 다른 건 없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이런 결레를 계속하는 것도 할 일은 아니었다.
엉뚱한 이 애의 제안에 난 비타민 갗는 햇살과 친구가 될 수 있으니 일단은 감사 할 일인지도 몰랐다.
"내가 처음 그 바에 간건 입학식날이었어요. 난 심리학과 다녀요, 아니 다녔었어요."
심리학과?
나의 마음을 두 방망이질 하기 시작했다.
난 정말로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특별히 위대한 일을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난 늘 사람을 알아야 할 것 같았고 그러려면 심리학을 해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난 갈 수 없었지만...
뭔가 할 말을 찾는 나에게 미은이가 계속 말을 이어간다.
"사실 난 컴퓨터 공학을 하고 싶었거든요? 근데 새아빠가 컴퓨터 사이언스를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아무 과나 썻던건대 덜컥 합격을 해버렸지모에요? 그래서 2년 다녀봤는데 영 나랑은 아니에요."
미은이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해버렸지만 한 꺼번에 그 것도 별로 친하지 안흔 사람에게 툭 툭 내뱉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거 같았다.
이 애는 그간 많이 외로웟던 것이 틀림없다.
사람은 자신을 많이 알지못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털어놓기가 더 쉬울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안다.
더욱이 형의 바에서 일하는 동안 난 정말 들을 말, 못 들을 말들을 많이 들었었다.
부부간의 침실 얘기 부터 숨겨놓은 비자금 얘기까지 어쩌면 치부에 가까운 이야기들이거나 혹은 남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이야기 들이었지만 마치 형이 만든 칵테일에 일종의 각성제가 들은 양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너도 나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홀린듯이 털어놓았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아무리 무덤까지 가지고 가고 싶은 비밀이라도 그 것을 가슴속에 간직하면 그 건 썩기마련이고 그러면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오죽하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에서 외쳐댔다는 전래동화가 다 있을 까만은 사람은 근원적으로 누구한테건 털어놓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웅주형이 밤을 세우면서 우리들의 속 살을 까보이듯이 말이다.
"혼자 무슨 생각해요?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없을 줄 알았어요. 우리 낮술 한 잔 할래요?"
"네? 아니 대낮부터 무슨 술이에요? 낮술먹으면 부모도 몰라본다는 말 몰라요?"
"그런가? 잘 됬네요. 병근 아저씨도 나도 다 부모랑은 뭔가 어긋나있으니까 오늘 하루쯤 몰라본다고 뭐 나쁜가요?"
난 그 애의 팔을 잡았다.
"지금 그 말 무슨 말이에요? 부모랑 어긋났다는?"
신경질 적인 내 행동에 미은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 아파요. 이거 놓고 얘기해요. 기억안나요? 내가 부모님이 여기서 일하는 거 아냐고 하니까 네라고 했잖아요?"
이제사 기억이 났다 .
미은이가 가게에 화요일마다 나타난적이 얼마 안되었을때 웅주형이 레인보우 칵테일만드느라 내가 바텐에서 서있을때 그렇게 물어봤다.
하긴 우리 가게에 단골들은 내가 형과 함께 가게 위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을 알았고 사연이 있어서 그럴거라는 건 누가 봐도 같았다.
기분이 나쁜 것과 화가 난 것 이것의 차이는 뭘까?
미은이는 두 가지 감정이 한번에 나타난 사람처럼 얼굴색이 변했다.
"미안해요. 내가 술 살게요."
이말은 미은이의 삐진 마음을 푸는 열쇠였는지 그 애는 금새 미소를 띄었다.
"좋아요, 하지만 장소는 내가 골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