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ny누나는 문을 열어주자 마자 술 냄새를 풍기며 현관에 대자로 누어버렸다.
"누나? 괜찮아요? 누나?"
누나는 간신히 눈을 뜨더니 날 보고 웃었다.
"어? 이게 누구야, 우리가게 막내 아니야? 호호호, 병근아, 누나 술 좀 먹었거던? 흉보면 안 된다. 약 소 옥~~~~"
아무리 날씬한 sunny누나였지만 술에 취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사람을 일으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나봐라, 이 일은 내 전문아이가? Sunny야. 내다. 정신 좀 챙겨봐라. 응?"
웅주형은 누나의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내리더니 신발을 벗기고는 가볍게 안아 올렸다.
"웅주씨, 미안해요. 헤헤헤. 또 술 먹고 이리로 왔어. 저.엉.말. 미안해요. 아무래도 난 미쳐가는 것 같아."
형은 대꾸 없이 형의 방으로 누나를 데리고 갔다.
자리에 눕혀진 누나의 양말을 벗긴 형은 나에게 뜨거운 물수건과 대야를 가지고 오라 했다.
뜨거운 물수건으로 형은 누나의 화장이 얼룩진 얼굴, 어디서 넘어졌었는지 긁혀서 피가 맺힌 손, 그리고 퉁퉁 부은 발을 닦아주었다.
곤히 잠에 빠진 얼굴이었던 누나는 갑자기 오악질을 해댔고 웅주형은 잽싸게 대야로 누나의 구토물을 받아주었다.
0.1초도 늦지 않은 한 장면
너무나 익숙한 움직임들…
난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와서 이제는 소파를 펴면 침대로 변하는 내 잠자리에서 따뜻한 이불을 눈썹 위까지 덮고 누었다.
잠결에 몇 번이고 형이 대야를 들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소리와 달콤한 향을 내는 꿀물을 방으로 가져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누나의 불분명한 목소리와 함께.
"웅주씨.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바보같지?"
"내가 왜 이리로 올 때마다 날 받아주는 거야? 나한테 오지 말라고 해. 제발."
"난 그 사람을 용서 못하겠어. 내가 용서 못해도 되는 거 아냐? 말해봐. 난…. 그 사람을 아직도 사랑해."
한번도 형을 웅주씨라는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던 누나, 술 취한 밤에 찾아오는 누나를 다루는 형의 익숙한 손길…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자는 내내 나는 이상한 꿈들을 연속해서 꿔댔는데, 내가 커다란 연못 속으로 하염없이 가라앉다가 수초 속에 걸려 허우적 거리는 꿈과, 돌아가신 엄마가 날 꼭 안아주는 꿈을 꾼 거 같았다.
그리곤 조금은 울었는지 아침에 눈을 뜨려니 마른 눈꼽들이 그렇게 답답할 수 없었다.
아침에 날 깨운 건 sunny누나였다.
"병근아. 깨워서 미안해. 어제 나 때문에 놀랐지? 미안해. 자꾸 미안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오네. 이러는게 더 우습다, 그치? 나 지금 가. 나 본거 가게 식구들한테는 말 안 해줄 수 있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까 말 안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 미스터 지 자거든? 나 때문에 밤새 못 잤을 거야. 일어나면 나 잘 갔으니 걱정 말라고 해. 그럼 이따가 가게에서 보자."
누나에게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났지만 그래도 참 예뻤다.
술에 취했는대도 저만큼 이쁜 사람은 누나밖에 없을 거 같았다.
웅주형은 한 참 후에나 일어나서는 누나의 행방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그저 어제 밤에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난 온갖 생각을 다하고 있었다.
몸을 못추스릴 만큼 되어 찾아올 수 있는 사람.
두 사람은 혹시 연인 관계일까?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보였다.
둘은 함께 일하는 시간외에는 만나는 일이 없었다.
하긴 그들의 인연은 나와 형이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사연있는 만남일 터였다.
그 후...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밝혀지는 것처럼 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 이야기가 웅주형이 sunny누나를 왜 사랑하지 않을까에 대해 혼자서 많은 상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세속적인 사랑관 인지 보여주는 것 일수도 있었다.
그건 일종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형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보기보다도 훨씬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Sunny누나의 아이가 형의 가장 친한 친구의 아이라는 걸 형과 함께 살지 않았다면, 나 역시 다른 가게 식구들처럼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그즈음 일이 끝나고 나서는 난 형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고 있었다.
말이 소일거리이지 그건 거의 부전공을 공부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는데 웅주형의 도서관에는 내가 읽고 싶어하던 많은 심리학에 관한 책이 있었다.
그 날 밤에도 난 꿈의 해석을 읽고 있었다.
예전에도 물론 읽었던 거지만 형이 소장하고 있던 꿈의 해석은 오래되었지만 기품이 있는 가죽표지의 양장본이었다.
누렇게 바랜 세로 글씨체의 한 줄, 한 줄을 음미하고 몇 장을 넘기고 있는대 아주 얇은 메모지가 책갈피에 끼워져 있었다.
'웅주야, 그 애가 내 애를 가졌단다.
빌어먹을…. 난 왜 이 모양일까? 아이를 나을 거란다. 어찌하면 좋겠냐?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넌 분명 낳으라고 할 테니까… 하지만 난 그러기 싫은데 어쩌냐?
아니 그럴 수 없는데 어쩌냐?
날 개새끼라도 해도 좋아, 난 개새끼니까.
웅주야, 나 살고 싶다.
추신 : 만약 선희가 애를 나면 이름은 꼭 니가 지어주어야 한다.약속이다.'
갈겨쓴 글씨체로 알쏭달쏭한 말들만이 가득한 메모였지만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방망이질 해댔다.
이 메모를 형은 기억이나 할까?
만약 형이 기억하고 있었다면 분명히 이 책에 이대로 남겨두지는 않았을텐데...
도대체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떤 여자에게 몹쓸짓을 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분명했다.
며칠을 두고 난 그냥 이 메모를 모른척하려고 별의 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그건 허사였다.
누구보다 뒤지지 않을 만큼 난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형의 기분을 무지하게 살펴본 아침.
형의 컨디션이 최상인 아침운동 후의 시간을 기다렸다.
"형?"
"와?"
"저기… 형, '꿈의 해석' 마지막으로 읽은 거 얼마나 됬어요?"
순간 형이 날 멀뚱이 쳐다봤다.
왠지 찔끔한 생각에 더 이상은 물어보지 말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위기의식이 들면서 순진한 표정을 억지로 지으려는 나에게 형이 말을 했다.
"니 요즘 그 책 보나? 그럼 거기 있는 메모도 봤겠다, 그쟈?"
예상보다 강도가 세게 느껴졌다.
웅주형은 그 책도 메모도 그 내용까지도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