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면의 타일 붙이는 곳에서 조명등을 켜놓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웅주는 혼자서 일하고 있었다.
모든 인부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한쪽 벽면을 마무리 한 후 바닥에 앉아서 타일을 감상하며 담배를 피워문다,
"아직 안 간 분이 계시는구먼."
아무 기척도 못느꼈던 웅주는 느닷없는 목소리에 벌떡일어났다.
60대 중반쯤의 노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한 남자와 함께.
"실례지만 누구십니꺼? 예는 관계자외에 들어오시면 안되는데얘."
"젊은 양반 걱정하지마시게, 내가 바로 그 관계자니깐. 타일을 붙이고 있어나 보군. 자네 왜 아직까지 일하는가?"
웅주는 당당한 노인의 태도에 구지 누구인가를 물어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뭐... 이 건물이 좋아서예. 하나라도 제 손으로 더 만들고 싶어서 그랍니다."
노인은 털퍼덕 소리를 내며 시멘트부대위에 걸터앉았다.
젊은 남자는 그저 그림자처럼 노인을 따라다닐 뿐이었다.
"박서방, 아무래도 공사기간을 더 늘려야 할것같아."
"왜그러십니까? 장인어른?"
"시간에 쫓겨 지으면 마음이 담기지를 않지 않는가? 그럼 그냥 공장에서 규격 맞춰 나온 생산품으로 뚝딱거리고 말지 뭐하러 디자인하고 돈 더 들이나? 젊은 양반 안그런가? 자네 이름이 뭔가?"
"지웅주라고 하는데요."
"자네 왜 이 건물이 마음에 드는가? 보아하니 시간외 수당을 더 받을리도 없을텐데 혼자서 일을 이 시간까지 계속하고."
웅주는 말하기가 쑥스러웠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도면상으로 본 건물의 모습때문에 마음을 뺏겨서 그렇다는게 주인인 듯한 그의 앞에 내어놓기 초라한 느낌이었다.
"와 그런거 안있습니꺼? 느낌이 좋은거, 그냥 그 뿐인기라예."
"그런가? 어떤게 그리 느낌이 좋았는가?"
"창문예."
순간 파한대소를 하는 노인의 웃음소리에 젊은 두 남자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참 좋구먼, 이보게 박서방 그리고 지군. 오늘 참 재미있는 날이야. 한 명은 내 사위고 다른 한명은 내 건물을 짓는 청년이고. 그 창문 말이야, 나도 사실 그게 제일 좋아하는 부분일세. 내 수수께끼 하나내지. 그 창문이 뭘 의미하는거 같은가들? 맞추는 사람에겐 상품도 있다네."
박종범은 그 건물을 설계디자인하긴 했지만 장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아직 꿰뚫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해서 처가살이를 한지도 10년째.
겉보리 서말이면 처가살이안한다는 옛말이 있지만 이젠 시대가 변했다.
대개가 2명전후의 자녀를 낳는 시대.
장남이니 딸이니 하는 고정관념이 무너지기 시작한지도 꽤 오래다.
그의 아내는 처가집의 장녀이고 손아래 처남은 외국으로 나가 살고있어 일년에 한 번 얼굴보기도 어려웠다.
처음 결혼 할 때부터 장인은 늘 말해왔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덜 아프게 깨물어지는 손가락이 있는 법이거든."
항상 겉도는 아들보다 잔정많은 큰 딸을 사랑했다.
종범은 아내를 사랑했지만 아내집안의 엄청난 재력 역시 사랑했다.
아내사랑이 먼저였는지 재력에 대한 사랑이 먼저였는지 스스로도 자각하기 어려운 지경이 된 지금이었다.
처가살이라 남들은 말했지만 집안에 누가 있는지도 모를 큰 집에서 하루에 한 번 장인,장모를 만나기도 쉽지않았다.
사람은 누구가 꼭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 있기마련이다.
박서방에게는 장인이 그런 존재였다.
손대지않고 코풀기라는 말처럼 처가의 재산은 상당수 아내의 명의로 돌려져 있었고 아내는 종범과 공동명의로 그 재산을 관리했다.
하지만 그에겐 늘상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나 이 건물을 장인의 말대로 설계하면서 그는 장인의 탁월한 감각에 감탄을 금하지못했었다.
그래서 더욱 이 건물을 꼭 갖고 싶었다.
건축가라는 자신의 명성에 하나의 단단한 배경이 되어줄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장인이 수수께끼 같지않은 수수께끼를 낸 것이다.
정답은 아니어도 근사치는 가야만 한다.
복잡한 머리굴리기로 시간이 흘러가는 종범과는 달리 웅주는 부담이 없었다.
어차피 맞춰도 그만 못맞춰도 그만인 물음이었다.
" 이 사람들, 그냥 편하게 말해보라니까."
"눈동자같습니다. 장인어른."
힘있는 종범의 목소리는 텅빈 공사장을 메아리쳐서 울렸다.
"눈동자?"
"인생을 바라보는 눈동자말입니다. 우리 모두의 눈은 둘밖에 없지않습니까? 거기에 마음의 눈을 더해서 세 개의 눈, 그래서 창문을 세개를 만드신거 아닌지요?"
"좋아. 지군의 생각은 어떤가?"
"전 이 분 말씀을 들으니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눈에는 사람얼굴 같습니다. 가운데 큰 창문은 얼굴이고 양쪽은 귀같고...그저 기분 좋게 웃는 얼굴같아서 이 창문이 안 좋아졌습니꺼."
"허허, 지군도 나처럼 단순한 사람이로구만, 맞아맞아. 그 세개의 창문은 웃는 얼굴을 본뜬것이라네. 요즘 사람들은 그저 자기말만 하기 좋아하고 이유에 핑계에 변명, 합리화 하는것에 너무도 인이 박혀버렸어. 난 그게 늘 마음에 걸렸지.
나부터 많이 듣자, 듣자, 하지만 나이를 먹다보니 나도 말만 많아지고 허허 이것도 변명이 되지만서도 . 암튼 입은 하나고 귀는 두 개인게 말은 적게 하고 많이 들으라는 거라고들 하지않나? 그래서 얼굴만큼이나 큰 귀를 가지고 입크게 벌리고 웃는 일만 이 건물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네.
가만있자.. 그럼 결국 지군이 맞췄군. 상품을 줘야지."
노인은 가뿐이 시멘트 부대위에서 일어나 앉았다.
박서방은 편안한 얼굴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는 웅주의 눈에는 악다물어져서 턱뼈가 떨리고 있는걸 느낄 수 있었다.
종범은 노인의 뒤를 따르다가 불현듯 웅주를 바라보았다.
'낭패다, 하지만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너한테 작은 빌미라도 줄 생각은 추어도 없다.'
십년 이라는 시간은 자신의 장인이 어떤 일을 할 사람인지를 상상할 능력을 주어지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박서방은 이런 느닷없는 퀴즈쇼 다음으로 노회장이 벌일 일에 대해 한 발 앞서가고 있었다.
그런 섬뜩한 불길한 예감이 공사현장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인 웅주를 경계할 만한 큰 일일수도 있다는걸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기에.
"지군, 내 명함하나 줄테니, 언제든 시간나는 대로 날 만나러 오게. 상품은 그 때주지, 가만있어보자. 다음 주초에 비가온다고 하지않았던가. 박서방 그렇지않나? 그럼 어차피 그런 날은 일을 못할테니 겸사겸사 놀러오게나. 그럼 난 가네."
종범은 웅주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장인어른을 모시는 사람이 많으니 날 찾으십시오. 그럼 그 때 뵙지요."
"아, 예. 안녕히 가십시오. 어르신 그리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돌아서 있었다.
다운커뮤니케이션 이사 박종범
박서방의 이름이었다.
"자식, 그 되게 인정머리도 없고 싸가지가 바가지네."
웅주는 쿡 하고 주머니에 명함을 찔러넣고는 다시 굳어가고 있는 화장실의 타일 벽면을 바라보았다.
병아리가 당장이라도 알에서 깨고 나온것처럼 사랑스러운 밝은 노랑이었다.
바닥은 어제 이미 녹차잎색의 무광타일을 붙여놓았었다.
"아고야, 우째 이리 이쁘노? 풀밭에 병아리들이 막 노는거 같네."
담배맛을 느끼기도 전에 나타난 주인때문에 마무리 짓지 못한 한모금이 그리워졌다.
웅주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조명등아래로 퍼지는 희푸른 연기가 정말 맛있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