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준은 회사에서 그다지 두터운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필드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아픈 몸으로 일을 하는 것이기에 위에서 고운 눈으로 보질 않았다. 가축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사료부문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발생하는 가축들의 병이나 질환 등에 대해서 항상 숙지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 것들 모든 지역과장들이 공유하기 위해 본부 내의 전 지역과장들이 모여 축종별 교육을 하려고 할 때 석준의 차례가 돌아와서 발표를 할 때마다 머뭇거리는 식으로 발표를 하는 바람에 본부장을 비롯한 지부장들에게 큰 신임을 받지 못했으며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 칭찬을 받는 등 석준은 회사 내에서 제 역할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런 석준을 알기에 승희는 속만 탈 뿐이다. 말을 함부로 해서 석준이 화를 내기도 하지만 막상 하고 싶은 말을 걸러내고 참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승희가 보기에도 회사 내에서 석준은 미덥지 못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희가 석준을 좋아하게 만들었던 건 무엇일까?
-여보세요.
-승희 씨? 나 채현민이야
-어머나? 과장님 왠일이세요?
-왠일은? 왜 놀래고 그래?
-아뇨. 갑자기 전화하시니까요.
-그래? 내가 전화하는데 놀라운 일인가? 승희 씨. 이따가 퇴근하고 약속있나?
-약속 없는데요. 왜요?
-그래. 잘 됐다. 그러면 나랑 같이 영화나 보자
-어머 과장님 왠 영화요?
-나 혼자 영화 보기가 좀 그래서 승희 씨랑 같이 보려고 하지. 야우리 알지 거기서.
-저요? 무슨 영화요?
-‘집으로’ 봤어?
-‘집으로’요? 당연히 봤죠. 제 남자친구하고 같이 봤죠.
-승희 씨 남친 있어? 나한테 말 안했잖아
-그런 걸 왜 과장님한테 얘기해요?
-그런가? 승희 씨 남자친구가 누군데?
-제가 얘기한 다고 과장님이 아세요? 아니잖아요.
-승희 씨 그럼 스무고개 하자
-무슨 스무고개에요. 있어요. 아마도 얼굴 보면 아실 꺼에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아는 사람이란 얘긴데 내가 아는 사람이면 우리 회사나 대리점 쪽하고
관련된 사람일 테고. 기다려봐.
-아니에요. 과장님 됐어요.
-아니야. 내가 지금 대충 알 것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
-누군데요?
-그 사람이 이니셜로 성이 L 아냐?
-이씨가 한둘인가요?
-그러면 가운데 이니셜이 s아냐?
-s? 누구요?
-아냐 승희 씨 지금 시치미 떼는 것 같은데 내 예감이 맞아
-지금 누구 말씀하시는 건데요?
-아니 왜 화를 내?
-기분 나쁘죠 당연히 장난하시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미안해. 승희 씨가 화내는 것 보니깐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누구 생각하셨는데요?
-승희 씨도 알지? 이석준 과장.
-네? 이석준 과장님요? 하하 왜 하필이면 이석준 과장님이에요?
-아니. 그날 있잖아. 나하고 승희 씨하고 저녁 먹고 들어간 날. 승희씨가 내리자 마자 바로
이석준 과장 한테 전화가 온 거야
-그래요? 왜요?
-전화해서는 어디냐면서 그냥 전화했다고 하더니 바로 끊었거든. 그래서 난 지금 그렇게
생각한거지.
-과장님 헛 다리 짚으셨네요. 아니에요. 무슨 이과장님이에요.
-그래? 그럼 누구지?
-아실 필요 없으시잖아요. 그리고 영화는 사모님하고 같이 가세요.
-아이들 때문에 안돼니까 그러지. 내가 승희 씨한테 무슨 이상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이상한 짓 하지 안으셔도요 좀 그렇죠. 유부남이 처녀한테 전화해서 같이 영화 보는게요.
-승희 씨가 이상한 상상을 하는 것 같은데 아냐. 그런 거
-어찌 되었던 간에 영화는 같이 못 볼 것 같아요. 과장님. 죄송해요. 다음에 그때 같이 봐요
-그래. 그럼 난 야우리 앞에 벤취에 앉아서 책이나 보면서 햄버거 먹어야 겠다.
-과장님! 그냥 댁에 빨리 가셔서 가족분 들하고 같이 저녁 드세요.
-우리 와이프 지금 없어. 교회 갔어.
-그러세요.
-그래 알았어. 승희씨 끊을께.
승희는 그로부터 채현민 으로부터 집요할 정도의 전화를 받았다.
-오빠. 나 핸드폰 전화번호 바꿀까?
-왜?
-아니. 자꾸 이상한 사람이 전화해서 찾길래
-누군데? 핸드폰에 번호 뜨잖아
-번호도 안 떠.
-그러면 안 받으면 돼지.
-오빠? 어디야?
-아직 영업소야.
-그래? 일 많아?
-아니 지금 거의 다 했어
-그럼 이따가 뭐 할꺼야?
-이따가 이 대리님하고 술 마시기로 했는데?
-그래... 아니 난 오빠 일찍 끝나면 내가 가던가 하려고 했는데.
-오지마. 안돼
-왜? 노 부장하고 백 과장이 요즘 갑자기 집에 급습을 하기 때문에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내일이 일요일인데?
-혹시 몰라서 하는 얘기야
-그럼 하는 수 없지. 뭐. 그럼 내일 몇 시에 올꺼야?
-내일? 아~ 글쎄. 네가 오면 안 되냐?
-오빠가 와. 나도 피곤해.
-그럼 하는 수 없지. 내가 갈께.
-이 대리님하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몸도 안 좋으면서 무슨 술을 그렇게 먹는지 모르겠다.
-내가 뭐 술을 매일 마시나? 이 대리님하고 그 동안 얘길 못 해서 얘기 좀 하려고
-알았어요.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이따가 전화해요.
-알았어. 자고 있어 전화 할께.
「오빠?! 어디야? 전화도 안 받네? 전화 좀 해줘요.」
「모야! 우씨! 전화도 안 받고? 자나? 아니면 아파? 문자 받으면 연락 줘요」
-오빠? 어디야?
-승희야.
-응. 말해 오빠. 괜찮아?
-승희야. 사랑해. 승희야. 사랑해.
-무슨 말이야? 술 많이 마셨어?
-아니 많이 안 마셨어 딸꾹! 근데 딸꾹! 계속 딸꾹질 나온다. 승희야 정말이야 사랑해.
너 밖에 없어.
-나도 오빠 밖에 없어. 술을 얼마나 마신거야? 이 대리님은 가셨어?
-이 대리님! 치사한 사람. 도망갔어. 둘이 술 먹는데 술값 혼자 계산 하더니 그냥 갔어.
그래서 그냥 나왔어. 승희야. 보고 싶어. 승희야.
-나도 보고 싶어. 오빠! 괜찮아? 아이참. 집에 갈수는 있어? 거기 택시 없어?
-나 지금 택시 못타. 택시 하면 오바이트 할 것 같아. 그래서 지금 걸어가고 있어.
-어떻게 걸어 가려고. 술도 먹었으면서 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응. 괜찮아. 나 안 다쳐.
-그러길래 무슨 술을 그렇게 먹어. 짜증나 정말.
-이 대리님하고 간만에 술 먹으면서 회사 욕하고 노 부장하고 백 과장 호박씨 좀 깠다. 그
인간들 나한테 그렇게 하면 안 돼지.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야. 도대체
-오빠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래.
-아니. 아니 아무일 없었어. 승희야. 나 집에 다 왔어. 안녕
-알았어. 들어가서 빨리자.
승희는 속이 상했다. 토요일 날 홍성 까지 가겠다며 말을 했건만 오지 말라던 석준의 말 한마디가 서운했고, 자기는 오지도 못하게 하면서 이 대리님하고 늦게까지 술 먹은 것이 화가 났다. 더군다나 몸도 지금 좋지 않은 상태인데... 평소 석준은 승희에게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했다.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문자도 보내곤 했지만 승희는 왠지 감정 표현에 서툰 모양이었다. 석준의 그런 말에 무슨 얘기냐면서 되묻곤 했다. 그래서 석준은 무안하고 기분이 상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승희 역시 석준을 사랑하지만 그 말을 내뱉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 가슴 속에만 입 속에서만 맴도는 말이다. ‘사랑해’속으로 되뇌인다.
-오빠! 일어났어? 문 좀 열어봐.
-어 잠깐만. 아 미치겠다.
-뭐야. 속 괜찮아?
-별로 지금 계속 화장실 왔다 갔다 했다.
-그러길래 무슨 술을 먹냐? 몸도 안 좋다면서. 밥 먹을 수 있겠어?
-아니. 별로
-뭐라도 먹어야지. 북어국 끓여줄까?
-북어국? 그래 좀 해줘라. 내가 어제 너한테 전화했냐?
-그래. 했다. 기억도 안나?
-미치겠다. 전화해서 내가 뭐라고 했는데?
-뭐라긴 이 대리님이 술값 계산하고 오빠만 두고 갔다면서
-그 얘기만 했냐?
-아니 내 이름 계속 부르면서 승희야 승희야 사랑해.
-그래 허허허
-나는 오지도 못하게 하면서 술은 왜 먹냐?
-술 먹는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이 대리님이 좋으면 이 대리님하고 살아라! 잘 됐네. 이 대리님 사모님도 오빠
좋게 본다면서. 그래 같이 살면 되겠네.
-됐어. 무슨 얘기야 또.
-기분 나쁘잖아. 토요일인데 기껏 전화해서 간다고 하니깐 나보고 오지 말라고 하고 자기가
이따가 전화한다고 하더니 전화도 안 하고 뭐야. 매번 사람 기다리게 만드냐?
-미안해. 술 먹었는데 어떻게 해.
-그러길래 술을 왜 먹냐고. 그리고 지금 오빠가 술 먹고 그럴때냐? 어떻게 자기 몸 안 좋은
건 생각도 안 하냐? 그게 오빠 몸이지 내 몸이야?
-나도 안도 그런데 정말 이 대리님하고 간만에 술도 먹고 싶더라. 못한 얘기들도 많고.
-못한 얘기들 많으면 맨 정신엔 그런 얘기 못하냐? 정말 이해 안 간다. 이 대리님하고 살아
라. 그리고 오늘도 오빠가 온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뭐냐? 난 또 오빠 온다고 해서
기다렸어.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내가 오빠 기다리기만 하잖아. 기다리는 게 얼마나
짜증나는 건지 알아? 차라리 못 온다고 하면 내가 다른 일이라도 하지. 시간 맞춰서 온다고
해놓고선 매번 기다리게 만들기만 하고.
-너 기다리게 내가 일부러 하는 것도 아니잖아. 일이 좀 많아지니깐 늦어지고 차가 밀려서
늦어지는 것도 있는데 그걸 가지고 계속 짜증내면 어떻게 해. 가뜩이나 머리 아파 죽겠는데
왜 그래 계속. 그리고 너 지금 이렇게 얘기 하는 게 내가 아픈데 술 먹은 게 걱정 되서 하는
얘기도 아니잖아. 너 안 만나고 이 대리님하고 술 먹었다고 지금 이러는거 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내가 그럼 지금 오빠 앞에서 쑈하는거네? 걱정도 안 되는 사람 앞에
서 괜히 걱정하는 척?!
-그게 아니면 뭐야. 네가 괜히 화 낼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너한테 내 얘기하면 화만 내잖아.
-허! 정말 짜증나. 나 갈래.
-왔는데 그냥 가면 어떻게 해. 그리고 나 지금 못 데려다 줘.
-누가 데려다 달래요? 됐습니다. 저 혼가 갈께요. 이 대리님하고 편하게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