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24일』
남자친구가 생겼다.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하기사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만약에 인연이라면 오랫동안 지속되겠지... 지금 옆에서 자고 있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나 역시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직장동료로써 알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일로 해서 알게 된 사이이긴 하지만 좋은 사이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걱정이 되는 건 혹시나 헤어지지 않을까 고민이다. 경선이는 만나다 헤어질 수 있다고 말을 했지만 왠지 난 그 말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더욱이 지금껏 혼자였는데 그래서 만난 사람인데 어떻게 헤어질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침대 곁에 기대어 앉아있던 승희도 어느 새 고개를 까딱이면서 졸고 있었다.
-어. 목아퍼. 근데 몇시야? 11시 30분이네? 과장님! 이과장님
-......
-이과장님 집에 가셔야죠. 시간 늦었는데요.
-......
-과장님! 일어나시라니깐요. 11시 30분이에요.
-어~~에. 몇 시라구요? 11시 30분요? 미안해요. 피곤해서요.
-빨리 일어나셔서 집으로 가셔야죠.
-여기서 같이 자요. 허허허
-엥? 무슨 말씀이세요. 빨리 가세요..
-농담이에요. 미안해요. 승희 씨도 졸았어요?
-네. 깜빡 졸았네요.
-그럼 승희 씨 잘자요.
-과장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어제 잘 잤어요?)
(네. 과장님은요?)
(저도요. 밤에 계속 백과장님 전화 와서 아예 안 받았더니 오늘 화가 나신 것 같아요.)
(그래요? 오늘도 바쁘시겠네요.)
(아뇨. 오늘은 영업소에서 일 하려고요. 기안 쓸 것도 많고 해서요.)
(다행이네요. 수고하세요. 저도 일 해야죠.)
(네. 승희 씨 수고해요.)
-승희 씨. 저기 부여. 서천 지역 것 월보하고 일보 좀 뽑아주시겠어요?
문자 메세지 보내는 걸 마치고 핸드폰 덮자 마가 석준이 승희에게 다가와 요청한다.
둘 다 얼굴엔 따뜻한 웃음이 가득하다. 시작한지 첫날인 새내기들처럼 신선해보이기도 하고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양 자연스럽기도 하고. 다정한 그들의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마침 추석연휴라서 승희는 집으로 가기 위해 회사에서 준비한 선물들을 가지고 천안으로 가기 위해 퇴근 후 바로 홍성 역으로 향했다. 회사 사람들에겐 기차 타고 집으로 향한다고 했으나 일산이 집인 석준과 함께 가기 위해서 승희는 기차역에서 내려 5분정도를 기다린 후 석준과 함께 갔다. 석준을 기다렸다가 집에 있는 무거운 선물들을 차에 싣고 천안으로 향했다. 승희는 괜찮다고 했지만 석준은 어차피 집에 갈 때 천안 들른다고 하면서 극구 승희와 함께 가기를 원했다. 천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 둘은 일상적인 대화들을 나눴다.
-과장님. 저기에요. 저기서 세워주시면 되요.
-이거 짐은 어떻게 들고 갈려고요
-괜찮아요. 동생 나오라고 하면 되요.
-됐어요. 가게가 어디에요. 내가 가게까지 옮겨주고 갈께요.
-아우. 됐어요. 이거 동생하고 같이 들면 되요.
-그래도 여기 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가요. 이 무거운 걸 들게 하고.
-괜찮다니까요. 저 힘 좋아요. 그리고 엄마,아빠 가게에 일하고 계시단 말이에요.
-그게 어때서요. 간 김에 인사도 드리면 되지.
-무슨 인사에요. 빨리 가세요. 올라가는 길 막히면 어쩌려고요. 여기서 가게하고 가까워요. 됐다니깐.
승희는 석준이 자꾸 짐을 들어준다며 가게까지 들고 오는 것을 억지로 말렸으나 석준은 승희의 억지에 아랑곳 하지 않고 짐을 들고 가게에 들어왔다. 놀란 것은 승희의 어머니와 이모였다. 가게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와 이모는 갑작스레 등장하는 승희와 석준을 보고 누구냐며 묻더니 이내 얼굴에 웃음이 번져나갔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그 웃음에 승희는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과장님! 빨리 가세요.
-왜. 승희야. 저녁 안 드셨으면 뭐라도 드시고 가세요. 그런데 누구시니?
-어우. 엄마 됐어. 과장님 빨리 가셔야 돼. 빨리 가세요.
-얘! 넌 손님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니? 우리 승희가 좀 그래요. 말도 좀 막하고
묵뚝뚝한 면도 있는데 아직 어린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같이 있으면 좀 그래도 많이
이해 좀 해주세요. 아직 어려서 그러니까요.
-엄마. 무슨 얘기야. 과장님 빨리 가세요.
-알았어요. 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추석 잘 보내시고요.
-어떻게 해요. 뭐라도 먹고 가셔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엄마. 나 과장님 저 앞에까지만 바래다 드리고 올께요.
-그래.
-거봐요. 제가 오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창피하단 말예요.
-뭐가 창피해요. 보기 좋기만 한데 그런데 아버님은 어디 가셨나봐요?
-배달 가셨나? 엄마도 가게에서 일 하실 땐 지저분하게 입고 계시고 가게도 작고 해서
그렇죠.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어머니 인상 좋으시던데요. 왜.
-배 안 고프세요? 가게에서 뭐라도 들고 올걸 그랬나?
-아니에요. 빨리 들어가봐요. 기다리시잖아요.
-알았어요. 빨리 가세요.
-저기 승희 씨. 그냥 헤어져요?
-그럼 뭐해요? 가세요. 댁에서 부모님들이 기다리시잖아요.
승희는 석준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알았다. 이제 경우 만난지 1주일이 된 사이였지만 그 둘은 아직 손도 잡아 보지 못했다. 석준의 그런 말에 승희는 시치미를 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과장님! 이따가 밤에 만나요.
-어디서요?
-채팅이나 같이 하자구요.
-그거 좋죠. 그럼 내가 먼저 들어가서 자리 잡고 있을 테니 들어와요
-네. 올라가는 길 막히지 않아요?
-그다지 막히지는 않는데 피곤하네요. 졸려 죽겠어요.
-조심하세요. 야간인데다가 이렇게 통화까지 하면 더 위험 할텐데. 과장님 전화 끊어요.
-왜요?
-위험하잖아요. 그러다가 사고 나면 어떻게 해요.
-괜찮아요. 사고 안 나요. 그리고 이렇게 해야 잠도 안 오고 통화하니까 좋잖아요.
승희는 석준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통화료가 많이 나올 것이 걱정은 되었으나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는 못해도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너무도 즐겁고 행복했다.
-승희야! 누구야?
-회사 과장님!
-엄마 아닌 것 같아. 아까 둘이 얘기하는 거 보니깐 언니 남자친구 같아.
-됐어. 무슨 남자 친구야. 서울 가는 길에 나 짐 많아서 들러서 내려 주고 간 거야.
-승희야! 남자친구 생기면 엄마랑 아빠한테 꼭 데리고 와 먼저 우리가 먼저 봐야 사람
어떤지 알잖아.
-아~ 참 남자친구 아니라니깐.
-그런데 사람 착하게 생겼다. 엄마는 아까 그 웃음소리 맘에 들더라. 남자답게 호탕하잖아.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래. 그런데 나랑 뭔 상관이야.
-승희 씨. 여기 방 잡았어요. 빨리 들어와요.
-제 핸드폰에다가 문자로 남겨주세요. 거기 주소요. 그리고 아이디 향기로 들어갈께요.
-과장님! 들어왔어요. 어디계세요?
-내가 메시지 보낼께요.
「daniel : 아까 어머니가 뭐라고 안하세요?
향 기 : 그냥 누구냐고 물으시길래 회사 과장님이라고 했어요. 안 피곤하세요?
daniel : 괜찮아요. 어차피 내일도 쉬는데요. 간만에 pc방에 왔네요. 뭐해요.
향 기 : 지금 과장님하고 채팅하잖아요.
daniel : 아니 방금 전까지 뭐 했냐고요.
향 기 : 가게에서 대충 저녁 먹고 집에 와서 씻고 바로 들어온거에요.
daniel : 그런데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요?
향 기 : 집에 있는 컴퓨터가 좀 속도가 느려서 그래요.
daniel : 동생들은요?
향 기 : 여동생은 남자친구 만나러 갔고 남동생은 아직 가게에 있어요. 부모님이 뭐라고
안하세요. 오래간만에 왔는데 집에 있지도 않는다고.
daniel : 그러시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을 수도 없잖아요.
향 기 : 내일은 뭐하세요?
daniel : 내일 이모님 댁에 갔다가 조카들하고 좀 놀다가 집에 들어가야죠. 승희 씨는요?
향 기 : 저야. 집에 있어야죠. 어디가는 것도 아니니까
daniel : 큰집이 서울이라면서요. 거기 안 가요?
향 기 : 안 가려고요. 예전에 갔는데요. 아빠가 왔다 갔다하면 피곤하니까 그냥 집에
있으래요. 그래서 저흰 안가고 아빠랑 엄마만 가세요.
daniel : 그래요.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그런데 그게 좀 그런 질문인데요?
향 기 : 뭐든지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면 다 해드리죠.
daniel : 지금까지 사귀던 사람은 없었어요?
향 기 :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한명 있었어요.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만난
친구였는데. 한달 정도 사귀었는데 좀 안 좋은 일로 헤어졌어요.
daniel : 무슨 일인데요?
향 기 : 돈 문제도 있고 해서 크게 싸우고 헤어졌거든요. 그러는 과장님은요?
daniel : 지금까지 2번이고 승희 씨가 3번째인데요.
향 기 : 거짓말!
daniel : 정말이에요.
향 기 : 그 여자분들 하고는 왜 헤어지셨는데요?
daniel : 그냥 제가 싫데요.
향 기 : 왜요?
daniel : 몰라요. 잘 안 맞았나봐요. 승희 씨 안피곤해요?
향 기 : 좀 피곤하긴 한데 집이니까 괜찮아요. 과장님 피곤하시죠. 부모님 기다리시겠어요.
시간도 벌써 5시 다 되어가는데요?
daniel : 그럼 5시 까지만 하고 가지요. 뭐.
향 기 : 제가 괜히 채팅하자고 한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daniel : 아니에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승희 씨랑 얘기 많이 하겠어요.
향 기 : 과장님 5시 넘었어요. 빨리 가세요. 피곤 하실텐데 그리고 몸도 안 좋으시잖아요.
간만에 댁에 가셨으니 푹 쉬시고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도 많이 드시고요.
daniel : 그래요. 그럼. 나 그만 갈께요. 이따가 일어나서 전화 할께요.
향 기 : 빨리 가서 주무세요... 이따가 뵈요.」
-승희 씨. 잘 잤어요?
-과장님은요?
-아직도 피곤해요.
-그러면 더 주무시죠.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
-잠이야 더 자고 싶은데 조카 놈들이 자꾸 pc방에 스타크래프트 같이 하러 가자고 해서요.
-또 pc방에 가세요?
-오래간만에 만나는 녀석들이라 거절할 수도 없고 갔다가 두어 시간만 있다가 오려고요.
승희 씨 내가 이따가 다시 할께요. 지금 조카 놈들 나오거든요?
-승희 씨. 미안해요. 어우 자식들이 안 보는 사이 실력이 많이 늘어서 좀 오래 걸렸어요.
-아니에요. 저녁은 드셨어요?
-이제 가서 먹어야죠.
-그럼 저녁도 안 드시고 거기서 몇 시간 동안 계신 거에요?
-네. 그리고 승희 씨 홍성에 언제 갈꺼에요?
-저요. 출근 전날에 갈려구요. 왜요?
-그 전날 가지 않을래요?
-하루나 일찍 가서 뭐하게요?
-가서 승희 씨랑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그러게요.
-저야 언제 가던지 관계야 없지요. 그럼 내일 홍성에서 만날 까요?
-아니에요. 제가 내일 집 앞으로 갈께요.
-됐어요. 귀찮게 왜 또 천안에 들르시려고 해요.
-홍성에 가려면 어차피 천안에 들려야 하는 데. 내일 제가 여기서 출발하기 전에 전화 할께요.
-저야. 뭐 가지고 갈 짐도 있으니 과장님이 들러주신다면 좋긴 하죠. 그런데 미안해서요.
-제가 승희 씨한테 미안하죠. 오래간만에 부모님 만나는 데 일찍 가자고 하니까요.
-괜찮아요. 그러면 피곤 하실텐데 빨리 들어가서 주무세요. 약 드시는 것 잊지 마시고요.
-그래요. 내일 일어나서 전화 할께요.
-엄마! 나 내일 홍성 갈께에요.
-왜? 내일 모레 가도 되잖아
-그냥 가서 좀 쉴래요. 집에 있으면 쉬지도 못하고.
-내일 고모 오신다고 했으니까 고모랑 성근이 오빠 보고 가 그럼.
-봐서요. 일찍 오시면 보고 가는데 늦게 오시면 못 보고 가야죠.
승희가 석준과 만난 지 1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사이엔 시간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껏 싫었다가도 금새 좋아지고 또 어제까지만 해도 너 없으면 못 산다고 말을 하다가도 하루 해가 바뀌기도 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뀔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시간이란 단지 숫자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