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을 호텔에 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울 수가 있으랴마는 정리가 필요하다. 다시 택시를 타고 북부에 내려달라고 말한다. 이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면 한잠도 못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밤바다의 바람은 찹고, 소리는 일렁이듯 내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이렇게 멀리 와 버린 건, 그래서 돌아가기 어려운건, 누구도 아닌 내 잘 못임을 마음 가득 느낀다. 여기저기 불야성같은 이곳의 밤도 어느 순간에 잠들 듯 , 나도 그럴 것이다. 진과 현정 그리고 내 그때의 일들은 아마 빛바랜 추억이 될것이다. 진을 데리고 올걸 그랬다. 겨울 밤바다의 소리를 들려 주었으면, 그의 마음도 진정이 되었을텐데.. 잠시 걷는다. 그와 걷던 길, 그때와는 사뭇다른 길이지만, 같은 길을 걷는다. 우리가 함께 가졌던 어린 시절의 기억하나만으로도 앞으로는 걱정없을 것을 믿는다. 그는 꿈길을 헤메이고 있을 것이다. 오래 누적된 피로가 그를 덮고 있었으니까. 나또한 하루를 투자한 서울행에 많이 지쳐있다. 과연 그와 현정의 결혼식에 가야할 것인가? 그 대단한 화두앞에 나는 작은 쥐한마리가 되고만다. 아마 가야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정리될 무렵이면 그들을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만날수 있을 것이다. 자꾸 걷는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끝없이 걷는다. 어디즘에서 걸음이 멈춰질까? "너 왜 그냥갔어." 또 그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환청을 기대하진 않았다. 저쪽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성큼 다가선다. "역시 여기 있었군. 술은 좀 깨니?" 나는 황당했다. "너 여길 어떻게.잠 안잤니?"그는 당장에 외투를 벗어 내게 쒸운다. 너무 커서 단이 모래위까지 닿아 보인다. "야. 나 안추워. 너 입어. 감기 걸리겠다." 나는 어깨를 피고 기지개를 해 보이다. 그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여기 많이 좋아졌네. 예전엔 아무것도 없었는데..나 어릴 때 말야." 그는 웃음인지 울음인지를 모를 어려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시간이 몇신데 지금, 이렇게 이쁜 아가씨가 밤바다를 어슬렁거리는지 모르겠네, 넌 예나 지금이나 너무 겁이 없다.정영은선생님" 그는 한마디로 내 생각을 다 알아챘다는 듯 말했다. "저기 좀 들어가자. 춥고 배고프다." 그는 멀리 있는 붉은 포장마차를 가리켰다. 정말 춥고 배고파 보인다. 실내에 들어서니 훅하고 안경에 김이 서린다. 그는 소주와 오뎅같은 걸 시킨다. 나는 가만히 있는다. "이런 곳에서 먹어야 제맛인 음식이 있지. 소주같은 거 말야. 파리는 이런 곳이 없어. 그래서 살기 싫다. 자 먹자." 우리는 마치 긴 밀월 여행을 마치고 방금 돌아온, 적절히 않은 관계를 가진 사람들 같다. 누군가 말을 걸어 온다면 탁자 밑으로 숨는 헤프닝이 일어날 것 같다. "많이 먹어. 너 저녁도 안먹었지." 그러고 보니 나도 아침을 먹은후 칵테일 몇잔이 전부인 것 같다. 그는 맛있게 먹는다. 참 맞있게. 우리는 말 없이 그냥 먹는다. 그것이 최선이다. 소주를 두병즘 비울 때 일어선다. "나 갈께. 너무 늦은 것 같다. 너도 좀 쉬어야 하고.." 나도 말 끝을 흐린다. 외투를 들고 모래 밭을 자박자박 걷는다. 뒤에서 그가 부르는 소리가 얇게 들린다. "정영은, 그냥 가기냐? 야,,,야"
집으로 돌아온다. 역시 아무도 없다.
보일러를 온도를 높이고, 샤워를 한다. 따뜻한 물줄기가 맨살에 닿을 때, 피로같은 것이 씻겨 내려간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오늘따라 집이 왜 이렇게 커보이는지. 고작 9평짜리 오피스텔인데.. 마음이 추운날은 무엇을 해도 따뜻해 지지 않는다. 방한켠에는 뜨다 만 스웨터가 보인고, 그 옆에 진이가 쪼그리고 자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는다. 될수 있는 한 아무 생각없이. 텔레비전을 켠다. 나오는 모든 채널을 돌린다. 몇번이고 돌리고 또 돌린다. 그래도 자꾸만 전화기로 시선이 간다. 호텔에서 가져온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에서 번호를 찾아 누른다. "시그너스죠. 501호좀 부탁합니다" 머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 손이 먼저 나간다. 프론트에 아가씨는 친절한 음성으로"아직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전할 말씀이 있으면 메모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여러번 걸었지만 그는 없다. 아직 그곳에 있는걸까? 다시 건다. 한 서른통즘 건 듯 하다. 나는 외투를 들고 나선다.현관문을 열때 진이가 깨서 내 다리를 물고 놓지 않는다. 나는 간신히 녀석을 떼어 놓는다. 문을 잠그고 나와 택시를 탄다. '아저씨 북부로 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