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는 만원이었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이륙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스튜어디스들이 비상시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활달한 동작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울고싶어진다. 이륙 후, 포항까지는 45분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일요일을 정신없이 보내고는 또 내일이다. 공항을 나와 택시를 잡는 것과 동시에 핸드폰을 켠다. 기내에서는 잠시 꺼두어야 하니까. 잠시후 메세지를 알리는 음이 울린다. "영은아. 잠시만, 기다려 지금 간다." 다음 비행기를 탄 모양이다. 갑자기 가슴이 두방망이 질을 한다. 다시 공항으로 들어가 앉는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가방을 소중히 매고는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어딘가로 가는 사람들,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내가 앉아 있다. 멍청하게, 외롭게 누군가를 기다리며 앉아 있다. 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나올 때 마다 아찔함이 느껴진다. 출구에서 진의 모습이 보인다. 멀리서도 한 눈에 그를 알아본다. 예전처럼 긴 팔을 휘적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서 차 향기가 난다. 잘 끊여진 녹차향이.... "안가고 있어서 다행이다. 서둘러 오느라고 내 모양이 말이 아니다." 그는 따뜻하게 말한다. 그 말에 그만 쓰러져버리고 싶다. "왜 왔어. 그냥가지. 너도 참 못말린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피해 우리가 간 곳은 바닷가 언덕의 작은 카페였다. 동료 교사들과 가끔 들르곤하던 집이었다. 실내는 아늑하고 불빛이 다사로와 꼭 우리집 같은 그런 곳이다. 그와 나는 여느 때 처럼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세월이 비켜간 걸까?' 그의 얼굴은 더 섬세하고, 더 잘 정돈되어 있다. 또 다른 모습의 침묵이 찾아온다. 은은한 클래식이 카페를 감싼다. 이건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참을 수 없는 시간이다. "현정이는 어떡하고 왔어. 기다릴텐데.." 그 와중에 현정의 이야기를 하는 나도 참 한심스럽기 짝이없었다. "현정인 집에 먼저 갔어. 아마 알았나봐. 내가 너 따라 갈 걸." 그는 얇게 웃는다. "너 참 안변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너에게 나쁜 짓, 맘상하는 말 많이 해서 벌 받나 봐" 시간이 흐를 수록 더 짙어지는 그리움이란 놈은 주체할 수 없는 물건이다. 그로 인해 내가 숨 죽이며 울어야 했던 순간을 어떻게 진에게 말할 수 있을지,,"너는 참 많이 변했어. 씩씩하더니 다소해지고, 큰소리치더니 나긋하게 말하고, 이제 우리 영은이 선생님 다 됐네." "그럼 시간이 몇년인데.. 강산이 한번 즘 바뀔 수도 있었는데,..." 둘은 물끄러미 본다. 그냥. 이런날은 술을 한잔 해야 하는데 옛 생각 하면서.. "여기요,"그는 여전히 큰 소리로 아가씨를 부른다. "블랙러시안 한잔하고, 너는?" "응, 나도" 그는 무엇을 더 추가하여 시키는 듯 했다. 아가씨는 빠르고 경쾌하게, 다리를 약간 실룩거며 돌아갔다. "너희 어떻게 된거야?현정이랑 너 " 나는 드디어 묻고 말았다. 묻지 말걸 하고도 결국은 말이 나갔다. 그는 조금 긴장되어 보인다. "결혼하려고 해.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야.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어." 파리로 간 후 얼마 되지 않아 현정이 파리로 왔고, 그들은 조금씩 고향에 대한 이야기로 친근감을 쌓았던 모양이다. 현정이 파리로 간다고 했을 때의 그 망막함이 이런일을 예상했었던 것 같다. "그랬구나. 축하해. 사실 너 기다리느라 결혼도 못했는데.. 그동안 못되게 군 거 사과도 해야할 거 같고, 또 너 전시회하면 그때 얘기 하려고 안했지. 내가 너에게 말했음 파리로 가기나 했을 거 같아? 난 지금 좋아. 기다렸던 넌 돌아왔고, 성공했고, 전시회도 했어. 신문은 너 얘기로 들끊는 가마솥같잖아. 너 정말 자랑스럽다." 그는 한숨을 쉰다."우리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니? 세월이 얼만지 알아? 7년이야. 서른이 넘었다구. 우리가 어렸을 때는 그랬다고 쳐. 근데 지금은 왜, 안돼니?" 그도 하면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결혼을 하기로한 여자가 있고, 그 여자가 내 친구인데도 그는 서슴치 않는다. 오히려 약간의 위로를 받는다. " 난 괜찮아. 이거 축하할 일 이잖아. 그리고 현정인 누가 봐도 좋은 아이야. 네게 안성맞춤이고, 성격도 그만하면 좋지.그리고 내 친구잖아 . 너희 둘 다" 현정과 연락이 끊긴지는 약 2년 정도 된 것 같다. 그녀가 파리로 가고 한 1년즘 되었을 것이다. 현정도 내게 연락할 용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진아. 잘 살아. 네가 나 좋아했던거, 내가 너 기다랬던거, 또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마주 있는 거 모두 잊어. 시간이 지나면 마치 꿈 속의 한 장면처럼 흐릿하고 아득해 질거야. 메아리처럼" 거의 파김치가 되어간다. 몇잔의 칵테일을 연거푸마시면서 어지럼증 같은 게 생겼다. 얼굴에 홍조가 돌고, 시야가 약간 흔들린다. 술을 언제 마시고 안 마셨는지 기억에 없다. 다만, 지금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이 내게 무엇 보다 중요하다." 영은아, 은아, 니 이름 이쁜거 알아? 내가 지금까지 들은 이름 중에 제일 이뻐. 그것보다는 니 마음이 더 이쁘지만.. 나 잊지 않을거야. 아니 못 할거 같아. 어쩌면 죽을 때까지 .. 노력하지도 않을거야.그러니까 너도 강욘마. 결혼은 해야 하지만, 널 이렇게 잊기는 싫어." 그는 약간 취기가 도는 얼굴이다. " 야 너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내일 돌아가야 하잖아. 벌써 몇잔 째야.너 이러지 마. 난 축복해 줄거야. 너도 현정이도"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실망과 절망이 한꺼번이 마음에 밀려온다. '극복할 수 있을까?' "결혼식은 언제 해? 여기서? 아님 파리에서.정말 거기 눌러 살 건가 봐." 나는 약간 높은 톤으로 말했다. "3월11일" 짧게 말하는 그의 입술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를 호텔까지 바래다 주기로 했다. 잘 정돈 된 길과, 도시의 불빛, 소도시의 밤은 여전히 깨어있다. 자정을 알리는 시보기 울린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다. "같이 있지 않을래. 아무일도 없을거야. 옛날처럼 여행갔다고 생각하면서 말야. 영은아. 가지마." 낮게 말한다. "아니, 그냥갈래. 너도 쉬어야 하잖아." 택시기사는 "다 왔는데요.시그너스호텔" 나는 차비를 낸다. 운전기는 다 아는 데 뭘 내숭이냐는 표정으로 거스름돈을 내민다. 그를 따라 호텔로 들어선다. 많은 시선이 순간에 우리를 스쳐갔다. 그는 보료방을 달라고 말한다. 오랜 외국생활에서 오는 또 다른 모습의 그리움이다. 그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돌아선다. 그의 뒷모습이 우울해 보인다. 자정을 넘긴 하늘은 더욱 검은 빛으로 변했다. 그래도 앓고 있던 이를 뺀 것처럼 마음은 시원했다. 찬 바람이 코트 안으로 스며든다. '뼛속까지 시리다'는 그말의 뜻을 지금에서야 헤아린다. 서른셋을 바라보는 겨울의 한가운데 그를 보냈다. 여러 가닥으로 남아 있던 많은 미련의 모습들을 지우며 나는 집으로 간다. 홀로 세우는 밤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단연코 혼자. 슬프지만 아름다웠던 내 마음 속의 사랑이 지금 여기 있다. 이곳에... 그렇지만 또 떠나야 할 사람임을... 정리되지 않는 생각의 고리는 사람의 피를 말린다. '아 출근해야 하는구나' 탄식같은 작음 숨소리가 내 뱉어 진다. 정말 시원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