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그녀 위기에 처하다.
회의실 분위기는 정말 살얼음 판이었다.
어디에서 기밀이 세었는지 모두 말 없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오는 자정 0시를 기해 방어 시스템이 정상가동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지난 새벽에 새로운 신차에 대한 소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상대 기업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 도대체 누구야….. 보안팀은 대체 뭐하고 있었어?”
화가 머리 끝을 꿇고 나온 듯 회장의 얼굴은 붉다 못해 푸르게 보이고 있었고 임원진 역시 죄다 머리를 숙이고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상황이었다.
누굴까.
어디서 나간 것일까.
분명 방어 시스템이 0시를 기해 가동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렇다면 기존에 조금씩 빠져 나가던 정보와도 관계가 있는 사람의 소행일까.
알 수 없는 물음이 계속 해서 꼬리를 물었지만 뭐라 뾰족하게 나오는 대답은 없었다.
“ 이봐 본부장. 뭐라 말 좀 해봐… 왜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나?”
상황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이회장의 노기가 아직도 회의실 안에 가득했다.
현준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다.
보안 시스템 작동은 그룹 내에서도 가장 기밀에 속했고 정말 극 소수의 인원만이 알고 또 추진해 온 일이다.
누구란 말인가. 어디에서 정보가 세어 나갔단 말인가…..
“ 이미 엄청난 예산이 들어간 일입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예정대로 시스템은 가동을 하는 건가요? 아님 이 모든걸 덮어 버려야 하는 건가요?”
처음부터 방어 시스템에 대해 예산을 들먹여 가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총무 이사가 현준을 재촉했다.
“ 지금 까지 들어간 경비만 해도 전산실 1년 운영비가 모두 투입된 것 보다 많습니다. 더구나 이번 신차 소스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하니 모든 걸 감안 하자면 이번 사건에 대한 손해는 산술적으로만 생각 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걸 명심해 두시기 바랍니다.”
전산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지만 돈 굴러가는 일에 관해선 누구 보다 머리가 빠른 총무 이사는 이미 현준이 얼마 만큼의 책임을 져야 할지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현준 역시 무서운 눈초리로 총무 이사를 쏘아 보고는 있지만 그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그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다.
“ 엄밀히 따져 보면 보안 시스템 하고는 별 상관 관계가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당연히 시스템은 오늘 밤 자정을 기해 가동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누가 어느 정도의 소스를 유출 시켰는지를 정확히 가려 내야겠지요.”
전산실 실장의 의견에 모두 동조의 뜻을 표했다.
현준 역시 정확하게 핵심을 지적하는 실장이 고마웠다.
우왕자왕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현 상황과 피해를 정확히 파악하고 오는 자정에 시스템을 가동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머물자 몸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그럼 제가 이 일의 책임자이니 만큼 사태 조사에서부터 상황 보고까지 최선을 다해 마무리 짖겠습니다. 조심 다시 조심 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들 현준이 무엇을 조심 하라고 이렇게 거듭 당부 하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는 눈치이다.
어차피 이곳 회의 실에 있던 사람들만이 계획을 알고 있고 또 극비 문서에 접속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서로가 의심 받고 또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현준은 이런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일을 잘 처리 한다고 한들 결국에는 제살 깎아 먹기가 아닌가.
한성 자동차 내 가장 핵심 측근들이고 이미 십 수년을 한결 같이 한성을 위해 일해온 사람들을 의심 한다는 자체가 현준으로서는 큰 부담이였다.
모두가 회의실을 나간 사이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네트웍팀장이 현준의 어깨를 두두렸다.
“ 어거 제가 드릴 말씀이 될지 모르겠지만………”
평소 화통한 성격 답지 않게 말을 끄는 그를 현준이 재촉했다.
“ 어제 새벽에 저희 팀 LAN 증설 작업이 있지 않았습니까. 마침 팀원들이 출출할 것 같고 해서 밤참을 사가지고 오는데 김박사가 로비 한 켠에 혼자 앉아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걸 봤습니다.그 때가 시간상으로 2시에서 3시 사이였거든요. 그리고 저희가 일을 마치고 회사를 빠져 나갈 때 그 자리에서 왠 남자와 심각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걸 봤습니다.물론 노트북도 그대로 켜져 있더군요. 섣불리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 하지만 그래도 이번 프로젝트에 외부인은 김민수 박사 뿐이지 않습니까….”
말꼬리를 흐리며 회의실 문을 빠져 나가는 그를 보며 현준은 자리에 털썩 주저 않아 버렸다.
무슨 의미일까.
아침에 민수로부터 보고를 받을 땐 언급이 없던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 시간에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 상대방은 과연 또 누구란 말인가.
이제 현준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사실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가 또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이란 말인가.
갑자기 진한 커피 한잔이 그리워진다.
쉐도우팀 역시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착 가라앉은 분위기 였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업을 하고 있던 시점에 중요한 소스를 고스란히 도둑맞고 있었다.
현민은 현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 지금 알아보고 있어. 정말 미안해…”
뭐라 할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버린 현민의 표정처럼 쉐도우팀 분위기도 확 꺽여 버린듯 했다.
누구 할 것 없이 팀원 모두 현준의 눈치를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민수만은 여전히 혼자만의 일에 빠져 있는듯 보였다.
“ 김박사 잠깐 제 방으로 오세요.”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민수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민수가 현준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방금 뽑아낸 것 같은 헤이즐넛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 한잔 하겠어?”
미처 대답도 하기전에 현준은 민수에게 커피 한잔을 건넸다.
“ 커피 좋아하나?”
뒤늦은 질문에 무안해 하는 표정의 현준이 왠지 귀여워 보인다고 민수는 생각했다.
하긴 지난 리셉션 이후엔 현준과 스치기만 해도 민수의 심장은 미칠듯이 쿵광 거리며 달리기를 시작했고 이젠 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준에 대해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젠 그가 귀여워 보이기 까지 한다.
세상에 다 큰 어른 남자가 귀여워 보인다니 있을 법한 일인가…..
사실 그와의 만남이 한번씩 늘어가면서 민수는 현준에게서 전에는 전혀 느껴 본적이 없던 이성을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지난 번 테라스에서 받았던 키스 때문에 몇 일 동안이나 볼이 화끈거렸는지는 아마 짐작도 못할 것이다.
정면으로 바라 볼 용기가 없음에 이리 저리 사무실 안을 둘러보던 민수가 현준에게 시선을 멈춘건 한 참 후의 일이었다.
무엇 보다 왜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 지난 새벽에 신차에 대한 소스가 빠져나갔어. 물론 알고 있겠지만 말야.”
“ 네…”
“ 그런데 새벽에 네가 로비에 있던걸 본 사람이 있거든.”
잠시 말을 멈추던 현준이 커피를 마져 들이켰다.
“ 난 사실을 알고 싶어. 그 시간에 로비에서 굳이 노트북을 들고 무슨 일을 했던거야?”
한동안 무슨 뜻인지 몰라 현준을 쳐다보던 민수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다래졌다.
“ 무슨 뜻이에요?”
지금 이 남자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 흥분하지 말고 사실을 말해봐. 그럼 별일 아닌 거쟎아. 안그래?”
“ 별일, 아니 이게 별일 아니에요?”
민수의 손에 들려있던 잔이 부르르 떨려왔다.
황급히 잔을 내려 놓은 민수는 속으로 심호흡을 시작했다.
비록 많이는 아니지만 서로에 대해 믿음이 쌓일 만큼의 시간은 되었다고 생각한 건 민수 자신만의 착각 이었던가.
무엇 보다 우린 키스까지 한 사이인데……
생각이 거기 까지 미치자 당황한 민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자신은 외부 인사고 또 상황에 따라선 충분히 의심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지만 다른사람도 아닌 현준에게서 의심을 받는 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충격이었다.
사람이 한번 의심을 한다는 것은 그 사실에 관해 아주 명백한 결과나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은 마음 한구석 어딘가엔 끝까지 남아있는 법이다.
더구나 의심은 소문을 낳고 소문은 더 큰 소문을 만들어 사실화 시켜 버린다.
이미 수 차례 겪은 일인데도 그 때마다 가슴이 아파온다.
“ 제가 무엇에 대한 사실을 말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진행중인 일은 예정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럼.”
인사를 마치고 조용히 사무실을 나가 버린 민수를 보며 현준은 그제서야 자신이 너무 경솔 하게 행동 했음을 후회했다..
너무 오랫동안 이번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왔다.
그만큼 많은 책임과 결과를 요구 받았고 그 때문에 스트레스 또한 과중해서 이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명해 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자신은 꽤나 냉정하고 사리 판단을 할 줄 안다고 자부해 왔는데….
현준 앞에서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나온 민수는 아직도 가슴이 아팠다.
무엇보다 일에 관해선 한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민수로서는 아직 정확
하지도 않는 사실을 현준에게 말한다는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민수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이현준…..
당신 지금 나한테 잘못하는 거야. 그거 알아?
다시 한번 현준의 사무실을 돌아본 후 민수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