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어린 남매를 데리고 사는 아빠가 안돼 보였나 보다. 여기저기서 맞선이 들어왔다.
그 당시만 해도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태반이었으니 애둘딸린 이혼남이라해도 맞선자리는 많았다.
어느날 파란색줄무늬가 그려진 기다란 원피스에 망사 조끼를 걸친 아리따운 아가씨를 새엄마로 맞이했다. 완벽한 외모..그 미모만큼이나 마음이 아름다웠다. 오빠와 난 엄마라는 말과 응 이란 말을 교육받았다. 꿈만 같았다. 친엄마에 대한 악몽을 지니고 있던 나로선 새엄마가 천사처럼 느껴졌다.
78년.. 이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고 재혼을 하신 아빠는 천사같은 새엄마와 더 잘살아보려는 욕심으로 다음해 해외근로자가 되어 쿠웨이트로 떠나셨다.
아빠가 해외로 나가신뒤부터 새엄마는 천사의 탈을 한꺼풀씩 벗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꼬라지 보기 싫으니까 너그둘이 집 나가라"
두살터울인 오빠와 난 새엄마의 집나가라는 말에 무작정 나왔다.. 그냥 있으면 맞을것 같아서리...
어린 두남매 갈 곳도 없고 배도 고프고 .
길바닥만 보고 걸었다.. 오빤 내 손을 꼭 잡고선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하천으로 갔다.
하천에서 물이 빠지는 배수구가 있다. 배수구안에 물기가 없는 것을 확인한 오빠와 난 배수구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말이 없는 오빠는 마른 나뭇가지와 마른 풀잎을 줏어와 밤새 묵묵히 불을 지폈다.
밤을 새다시피하고 동이 트기도전에 배수구에서 나온 오빠와 난 갈곳을 몰라 집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배고픈 것도 잊어버리고 서성대고 있을 때 시커먼 그림자하나가 다가왔다. "잘~한다. 너거둘이 어데갔다 왔노?" 오빠와 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가자. 이것들아. 넘사시러버서.쯧" 꼭두새벽에 집에 잡혀온 우린 하루종일 새엄마의 집요한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배가 고팠다. 내 어린시절은 항상 배가 고팠다. 없어서 못 먹은게 아니라 있으면서도.. 넘치면서도 밥을 먹지 못했다. 배고프단 소리조차 할 수 없었다.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안 되었다.
겨울이 왔다. 하루종일 굶고 기운이 없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루에 앉아 하늘만 보고 있으려니 "미자야.. 미자예이~" 영순이 언니다.
형제가 많아 맏이인 영순이 언니는 친척집에서 지내다 방학이 되면 자기 집에 오는 언니다.
아무 말없이 언니에게로 다가서니 언니는 쑥 ~ 내팔을 잡아 당긴다.
"어여 들온나. 니 밥 못 묵었제..찬밥밖에 없는데 우짜노 이거라도 먹어라"
꾸역꾸역 막히는 목에 미친듯이 찬밥덩이를 쑤셔 넣고 있으니 마침 모여있던 동네 언니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에휴..저 어린 것이 여지껏 밥도 못 묵었나부네..쯧쯧"
"그러게 말이다.. "
"참 쟈 오빠는 어데갔노? 가도 밥 못묵었을 거 아이가..."
콧물을 삼켜가며 열심히 밥덩이를 목으로 밀어넣고 있는데 새엄마가 나를 부르고 있다.
"자야~미자야~"
"에구 쫌 더 있다 부르제 참...." 저마다 말을 거드는 언니들을 뒤로 하고 눈물을 삼키며 집으로 갔다.
"니 어데갔다 왔노.. 들와가 밥 처묵으라.."
보이지 않는 오빠는 찾지도 않고 나만 밥을 먹으라고한다. 지금 안 먹으면 또 언제 먹을지 모르니 오빠는 없더라도 나는 먹어야만 했다. 부엌으로 가니 우동 그릇에 찬밥이 수북했다.
밀려드는 오빠 생각을 뿌리치며 허겁지겁 먹었다. 추운 겨울날 쫄쫄 굶은 빈속에 얼음같은 찬밥덩이가 들어가니 이빨이 마주치며 온몸이 떨려왔다. 그래도 먹었다. 추운건 별 문제가 안되었다. 한참을 쑤셔 넣다보니 어느새 반그릇도 채 남지 않았다. 겁이 났다.
많이 먹었다고 맞으면 어떡하지...오빠야도 밥 안묵었는데....
"미친년이 더럽게도 많이 쳐묵었네.. 그만큼 쳐묵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