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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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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백


BY 액슬로즈 2003-09-05

 

[그 여잔...삼촌에게 필요한 여자다. 삼촌 꿈을 이루게 해 줄 여자란 말이다. 삼촌이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데 얼매나 고생한 지 니는 모르제?  이제와 모든 걸 포기할만큼, 어리석은 삼촌이 아이란 말이다]

[니 말은...영이 오빠가 나를 택할리 없다는 얘긴데...?]

[삼촌이 이성적인 사람이란 얘기다]

[난...오빠한테 나를 택하란 얘기를 한 적이 없어. 나에 대한 오빠의 마음이 어느 정돈지도 몰라. 어쩌면...한 때의 소나기같은 감정을 가졌을수도 있겠지. 그래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다. 니 말대로 그 여자만큼 대단하지도 않고 그런 대담한 용기도 내겐 없다.

내가 오빠를...사랑하는 건 순수한 내 의지인 것처럼 오빠가...그 여자를 택한다해도 그건 오빠의 의지다. 나도 니도...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가 안된다는 얘기다]

[군자같은 소리 그만해라!]

진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니 소원대로 삼촌한텐 입도 뻥긋 안할기다. 삼촌이 소라씨 따라 빨리 가 버리길 기도나 하는게 났겠다. 나 먼저 간다...]

 

재란은 돌아서 가는 진수를 쳐다보지 않았다.

무심한 바다만 응시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한다는 게 말이다.

마음이 아프다.

늘 그 아픔인 것 같은데도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아픔이 가슴을 후렸다.

 

[야, 진수 갔냐?]

[응...]

[야, 그라믄 이 많은 술을 누가 다 묵냐? 큰 맘 묵고 양주도 사 왔는데...?]

[우리가 마시면 되지 뭐...니도 나도 한 술, 하잖냐. 내가 여기 와서 는 건 술뿐이란 걸 니도 알면서...마시자. 마셔 보자! 밤새도록!]

[좋다. 까지껏...마시지 뭐. 야, 내가 이거도 준비해왔다 아이가]

은숙이 얇은 이불을 내밀었다.

[밤되믄 쫌 춥잖냐]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어느새 많은 술을 마셨다.

은숙은 여고때의 이야기를 풀어 놓았고

재란은 그런 시절이 있었는가 싶은 마음으로 추억을 되살렸다.

그리 오래된 시절은 아닌데도 마치 까마득한 옛 일처럼 여겨지는 건 왜일까...

 

[세상에서...제일 힘든 일이 사람 사랑하는 일 같다]

[야, 제일로 쉬운 것도 사람 사랑하는 일 이다]

재란은 제법 혀가 꼬부라 들었는데도 은숙은 말짱했다.

마시면 취하는 게 술이라는데 은숙에겐 마실수록 취하지 않는 게 술인 듯 했다.

 

[오늘따라 술이 맛있네?]

[니 마이 마셨다아이가. 눈동자도 풀린 것 같다야]

[그러냐? 그래도 정신은 말짱한데? 갈때까지 가보자...야, 잔 비웠다]

[그래, 그래. 마시라]

 

양주가 거의 비워질무렵 재란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숙은 취기만 돌뿐 아무렇지 않았다.

은숙은 재란을 자갈위에 누이고 가져온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래, 한 숨 자라. 자는 게 남는기다]

혼자 술을 따라 마시며 은숙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

[자는거냐, 취한거냐?]

소리도 없이 다가온 그가 조용히 말을 건네는 바람에 은숙은 기겁을 했다.

채 영이다. 그가 자는 재란을 내려다 보았다.

반갑지 않았다.

재란을 보고 그를 보자 은숙은 괜스레 화가 치밀었다. 인사도 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래요? 그 여자는 어디 가고...]

[내가 먼저 물은 것 같은데?]

은숙의 푸대접에도 그이 음성은 부드러웠다.

[둘다요. 이젠 재란이한테 신경 꺼요]

그가 재란이 옆에 앉더니 가만히 살피듯 내려다 보았다.

 

[소라가 오고부터 이 녀석, 계속 나를 피하더군]

[당연한 건 아니겠어요?]

[뭐가 당연한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졌나?]

우습다는 듯 그가 말했다.

[결혼할거라면서요? 그 여자의 아버지가 오빠를 후계자로 여기고 있다메요?]

[그게 내 생각은 아니잖아?]

순간, 은숙은 술이 확 깨는 듯 했다.

[아이 그럼, 그 여자하고 결혼 안해요?]

[결혼은...내가 원하는 여자랑 해야지.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원하는 여자랑...]

[그럼 딱 재란이네요, 뭐...!]

말이 앞섰다.

그가 은숙을 보았고 은숙은 아차했으나 늦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알고 있기라도 산 듯 영은 싱긋 웃기만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께요... 재란이...사랑해요?]

[언제부터 사랑했냐고 묻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가 피식 웃었다. 놀란 은숙의 입이 벌어졌다.

[아이, 그라믄 그 얘기를 와 재란이한테 안 했어요?]

[얘기할 기회를 줘야지..]

[야가 그동안 마음 고생이 얼매나 심했는데...거기다 진수가..!]

은숙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알고 있어]

[알아요?]

그는 대답대신 재란의 뺨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란 생각에 은숙은 어질러놓은 걸 주섬주섬 챙겼다.

[걔, 중학교때부터 오빨 좋아했어요. 오빠가 워크맨 꼽고 다닐때...오빠 별명도 워크맨이라요. 사랑한다는 걸 안 건 오빠가 여기 온 순간부터구요...전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부탁하나 하자. 내가 이 녀석한테 고백할때까지 이 일...비밀로 지켜줬음 좋겠다.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고...그럴수 있지?]

[좋아요. 재란이 쟤, 여기서 나갈 생각도 하고 있는 것 같던데..어쨌던 오래 걸리지 않았으믄 좋겠어요... 재란이 부탁해요]

[...고맙다]

그가 은숙에게 웃어 주었다.

 

채 영은 재란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 놓았다.

세상 모르고 잠든 그녀를 내려다 보며 영은 사랑 가득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그러니깐...네가 고등학교 1학년때 였을 거다. 진수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니가 단발머리를 날리며 찾아왔었지. 나를 보며 해맑게 웃어주던 니가...가슴에 꽉 박히더군. 그러나 그때 넌 너무 어렸고 나 또한 군대를 눈 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너를 접어야했어.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흐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