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그런 심각한 모습, 니하고 안 어울린다. 이제 그만 깨끗이 정리하고 털어라마. 재란이 생각도 좀 해줘야 할 것 아이가. 가 마음도 마음이겠나? 사랑은 아이더라도 재란이 가가 니 생각, 걱정 마이 한다는 거 니도 안 아나. 가도 니만큼 가슴앓이 하고 있다 아이가. 니보다 더 했음 더 했지 덜 하진 않을기다. 니가 한발 물러서서 이해 좀 해주고 격려 좀 해주면 안 되겠나?]
다리 난간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진수는 여전히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은숙은 그런 진수의 심기를 될수 있는 한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는 눈치였다.
[그라고 솔직히...니는 순애보적인 사랑하고는 거리가 멀다 아이가]
곧바로 진수의 눈이 은숙을 째려 보았다.
[아이...내 말은...!]
[그래! 심심풀이 땅콩같은 사랑이다. 우짤래?]
버럭 진수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심각하믄 다들 어디 아픈게 아인가...싶제? 맨날 실실거리고 다니니깐...]
[야, 누가 뭐...꼭 그렇다는 건 아이고...! 니는 와또 그런식으로 받아들이노?]
[너무 깝치지 마라...나도 재란이 마음 다 안다. 가를 여자로 본 시간보다 친구로 본 시간이 더 많다 아이가. 재란이가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 다는 것도 안다. 사랑을 포기하느냐...친구를 잃느냐...머리 터지게 고민중이다]
[사랑은 또 오지만 한 번 잃은 친구는 다시 오지 않는다...오래 고민하지 마레이]
은숙은 어려운 줄다리기를 하는 진수의 어깨를 툭 쳤다.
[그건 그렇고 재란이가 사랑한다는 짜식은 도대체 누꼬? 얘기해봐라. 내가 머 우예 하겠다는 것도 아이잖아. 말해봐라]
[야가...내가 묻지 마라 안카더나. 쪼매만 기다리면 저절로 알아 질끼다. 그때가서 충격받지나 마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기 다다]
[가시나, 니 그럴래?]
[[야, 재란이 온다. 우리 지금 도동 가봐야된다. 내 조카들이 놀러 온다고케가 마중간다]
재란은 반갑다는 얼굴로 진수를 보자 가볍게 어깨를 툭 건드렸다.
[반갑은 척 하지 마라마]
퉁명스런 말투였으나 그 속에 담긴 애정과 우정을 재란이 모를리 없었다.
[저녁에 술 한잔 할래? 내가 쏠께]
[그러자. 다른 애들도 다 불러서. 알았제?]
[누가 너그하고 술 마시고 싶댔냐? 병주고 약주고 있어, 그냥...]
*
은숙의 프라이드가 조심스레 해변길을 달렸다.
[그래도 진수가 친구쪽으로 결정을 볼 것 같은 분위기제?]
[... ...!]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러나 저러나 진수는 이미 상처를 받았는데...
치유를 한다고 해도 그 흉터는 남을것인데...
갑자기 은숙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채가는 채가다. 가 지금 니 상대가 누군지 그게 젤로 궁금한갑더라. 니를 사랑하기는 한건지...하여튼 채 진수 속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깐]
[그럼 다행이지 뭐...]
[야, 재란아. 니는 도시가 그립지 않냐? 제대로 된 커피숍도 가고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니, 영원히 여기 있을 생각은 아이겠제?]
[... ...!]
[야, 하긴...영이 오빠랑 잘되면 도시에서 살거 아이가]
앞날에 대해 재란은 아직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학교 문제도 남아 있었다.
다시 복직을 할건지...
다시 교단에 설 수 있는지...
자신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건 채 영이 옆에 있다는 거...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었다는 거...
그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그녀 자신만큼 깊고 확실한건지...
솔직히 그것 또한 자신이 없었다.
*
포항에서 출발한 썬플라워호는 오후 1시 10분에 도동항에 닿았다.
은숙의 조카들은 한참이나 후에 내렸다.
중학교 2학년 여자애와 고등학교 1학년 남자애였다.
여자애가 멀미를 했는지 얼굴이 노랗고 영 힘이 없어 보였다.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저기, 잠깐만요!]
밝은 톤의 여자 목소리가 그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울릉도에 사시는...분인가요?]
서울말씨였다. 분위기도 달랐다.
밝은 갈색의 웨이브진 긴머리를 집게핀으로 느슨하게 말아올린 여자.
타이트한 청바지에 붉은 빛깔의 니트를 걸친 세련된 여자.
[그런데요?]
재란이 말했다.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혹시 남...양동이라고 아세요? 어디로 가면 되는지 좀 가르쳐 주실래요?]
[우리가...남양동에 사는데, 남양동엔 ...?]
뭔가 불길한 기운이 쏴아. 하고 재란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자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혹시 채 영씨라고도 아세요?]
심장이 쿵. 했다.
어지럼증이 한꺼번에 몰려 오는 기분이었다.
재란은 직감했다.
그의 여자다!
[영이...오빠를 찾아오신 건가요?]
은숙이 물었다.
[아시는군요!]
여자는 무척이나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은숙은 파랗게 질린 채 할말을 잃고 서 있는 재란을 건너다 보았다.
산 넘어 산이군...!
여자를 프라이드 뒷 좌석에 태웠다.
가는 내내 모두 말이 없었다.
재란은 넋나간 사람같은 표정이었고 은숙은 운전에 신경쓰느라 바빴고 은숙의 두 조카는 멀미땜에 정신이 없는 것 같았고 여자는...
여자의 표정은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저기요...]
은숙은 여자를 향해 물었다.
[실례지만 영이 오빠완...어떤 사인데요?]
[글쎄요...제가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대답이 된건가요?]
당당한 목소리였다. 자신감에 차 있는...
[네에...그런데 전화를 하시지 그러세요? 오빤 휴대폰도 있는데...?]
[계속 꺼져 있어요. 그리고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하지 않았어요]
연적이다...
그것도 자신은 상대도 될지 않을만큼 대단한 연적...
아름다운 여자다.
상상속의 여자보다 훨씬 아름답고 세련되고 섹시하고...
그 여자가 울릉도에 온 것이다.
영을 찾아...
재란의 워크맨을 찾아서...
*
[다 왔는데요]
프라이드가 멈추자 여자는 밖으로 내려섰다. 그리곤 담담한 얼굴로 동네를 한번 훑어보았다.
[집은 알아요?]
[모르죠. 좀 가르쳐 줄래요?]
[그러지요. 저쪽 길, 보이죠? 쭉 따라 올라가다보믄...!]
[제가 안내해 드릴께요]
재란이 말했다.
[야아...]
은숙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재란의 손을 잡았으나 재란은 그런 은숙에게 웃어보였다.
[가세요...]
[고마워요]
[동네가 자그마하니 꼭 동화 나라에 온 기분이에요]
여자의 말에 재란은 말이 없었다.
진수 집은 담이 없는 반면에 온통 푸르름에 싸여 있었다.
진수 할아버지 취미가 화단 가꾸시는 것이라 그 집은 마당이 넓고 나무가 많고 화분이 많았다. 온갖 꽃들과 야채들...
누가 물을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신가...?
했는데 물조리를 든 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재란을 먼저 보았다. 환하게 웃으며 물조리를 내려 놓으려든 그가 재란의 뒤에 있는 여자를 알아 보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영...!]
여자는 애교스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음성이었다.
여자는 달려가더니 그대로 영의 가슴에 안겼다.
놀라고 당황한 영의 눈은 여자가 아닌 재란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재란은 몸을 돌려 버렸다.
하얀, 그의 셔츠가 유난히 눈부셔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