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잔잔한 음악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카세트를 켜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싱그럽게 부는 여름 바람과 하늘과 부드럽게 물결치는 바다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어제 일...미안하다. 학교얘긴 안 하는 건데...]
진수가 먼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괜찮다. 그 문제로 니한테 화낸 거 아이다]
[그럼...?]
[......!]
침묵을 지키는 재란을 보며 진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숨을 고른다고 해야 하나...
[휴우...니도 눈치채고 있구나. 내가 니를...!]
[진수야]
가만히, 재란은 진수의 말을 잘랐다.
[진수야...사람 감정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좋겠지? 그러면 이루지 못하는 첫사랑... 가슴 아픈 짝사랑...이런게 없을테니깐...]
[믄 소리고?]
[너랑 나랑...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얘기다. 시작도 끝도 없는 누군가를 향한 짝사랑...
보고픔에 목말라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가슴 저린...
나의 존재를 모르는데...나를 바라봐주지도 않는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커져만 가는 사랑을...그것도 사랑이라고 하고 있는 나같은 바보도 있네]
[...재란이, 니...!]
재란은 놀란 듯한 진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아마도 니가 날 좋게 생각해준 그 시간보다 더 오래전 난.. 그사람을 가슴에 품었을거다. 사랑이란 걸 안 건...얼마되지 않지만 난 지금...누구보다도 지독한 사랑을 앓고 있다]
[니...진짜가?]
[그런데 지금...다른 무엇보다 마음이 아픈 건 진수 너다]
[......!]
재란은 진수를 똑바로 응시했다.
[니가 나만큼은 아니길 바래. 아니, 아닐거라고 믿어. 넌 은숙이만큼 나한테는 소중한 친구야. 그 관계를 난 잃고 싶지 않다, 진수야...]
진수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리고 한없이 복잡하게 얽혀가기 시작했다.
반신반의하듯...
[내가 니한테 해줄 말은 없어. 그 심정을 잘 아니깐...하지만 넌 이제 이렇게 마주앉아 얘기라도 할 수 있잖아. 난 그럴수도 그렇게 할 수도 없는데 말이야]
[....그 상대가...누군데?]
[알려고 하지마. 다쳐!]
심각하게 묻는 진수에게 재란은 cf의 한 장면처럼 말하며 피식 웃었다.
[니...상대가 유부남이제?]
재란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수다운 추측이었다.
[그럼 왜 말을 못하노? 내가 알면 안되는 사람이가?]
[알아서 좋을 게 없으니깐 그래]
[니 내 마음 돌릴라고 일부러 지어 낸 얘기제?]
[내가 그런 얘기 지어낼만큼 영악한 사람이냐? 은숙이도 알고 있어. 그렇다고 은숙이한테 케묻거나 하지마래이. 누군지는 얘기하지 않을테니깐...]
진수는 입속으로 무어라 내뱉었다. 좋은 말은 아닌듯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닷가에 모여드는 사람수가 늘고 있었다.
침묵이 감돌고 시간은 그렇게 소리없이 지나갔다.
[와 고백도 못했노? 니한테 그런 배짱이 있으면서...]
[...그럴 용기가 없었는데다...이젠 늦었댄다...사랑하는 사람이 있대]
[뭐?... ...바보같이...니는 뭐가 모자라 짝사랑이고. 짝사랑은! 바보같이...]
[그러는 니는? 니는 와 바보같은 짓 하는데?]
[그 자식 눈 삔거 아이가? 우예 니같은 애를 몰라 보노?]
재란은 웃음이 터져 나온 걸 겨우 참았다.
만약 그 자식이 자신의 삼촌인 걸 안다면 과연, 진수는 어떤 표정일까?...
그녀는 작은 소리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진수는 애꿎은 자갈을 자꾸만 바다에 던져 넣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화나고 그녀에게 화나고 그녀가 사랑한다는 그 놈에게 화나고...
그 화풀이를 바다에 하고 있었다.
[진수야, 너나 나나 우리 그냥...!]
[아무말 마라!]
이번에는 진수가 재란의 말허리를 걸고 넘어졌다.
[그래...언제부턴가 모르겠지만 난 그냥...니가 좋더라. 니만 보면 기분좋고...
니가 항상 내 옆에 있을거란 생각이 들대. 바보같다고 해도 좋다.
니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리란 생각은 쬐매도 못했다 아이가.
와 이리 기분이 찝찝하겠노. 와 화장실서 볼일 보고 그냥 나온 기분이겠노]
[진수야...]
[니가 내 맘 못 받아들인다는 거 알고 있다. 죽어도 친구란 말이제...]
[진수야...]
[니가 그랬제? 사람 감정 마음대로 안된다고...그라니 나한테 강요하지 마라. 자고 일어나면 변하는 게 세상이고 사람 마음이다 아이가]
[진수야...]
진수가 몸을 일으켰다.
[가자. 너무 늦었다]
돌아서는 진수의 뒷모습이 측은했다.
채 진수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위로해줄 방법이 그녀에겐 없었다.
그건 진수의 몫이다. 진수가 감당해야 할...
그녀가 그렇듯...
*
며칠 조깅을 하지 못했다.
다리에서 몸을 풀면서 재란은 저 너머에 있을 채 영을 생각했다.
내쉬는 숨마져 떨리는 순간이었다.
위험한 감정이었다.
자제를 해야하는...더이상 다가 가서는 안되는 감정을 재란은 오늘만!
오늘만! 하고 있었다. 번번히 감정은 이성을 앞지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녀가 멈추어섰다.
채 영은 코란도에 기대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디...가세요?]
[음...타라, 꼬마]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