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여느때와 같이 해질녁에 돌아 왔다. 옆방의 신혼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갈 모양이다.
"어디 가요?"
"네, 갑천에 갈려구요"
"좋겠네.."
婦는 먹을걸 챙기고 아이들은 夫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서는 모습이 참 평화롭고 아름답다.
"같이 가실래요..?"
夫가 내게 의례로 던지는 말이다.
"아뇨..다녀오세요"
오늘따라 夫의 모습이 근사해 보인다.
내 마음이 약해졌나. 그것도 나이라고 나이탓일까... 왜 부부의 모습이 좋아 보일까...
그 남자는 방으로 들어가서 무얼하는지 기척이 없다. 참 심심한 사람이다. 어지간하면 혼자사는 노처녀인 내게 관심이 있을법도 한데...
결국 방으로 들어온 나는 혼자가 되었다. 워낙 성질이 별나서 친구도 변변치 못한걸 나 자신이 잘알지만 왠지 오늘은 쓸쓸하다. 고독이 모여 외로운 산을 만들고 외로운 산이 모여 그리운 산맥을 만들다 보면 추억을 더듬는게 삶인가.
연약한 내겐 유일한 부모님이 있었다. 딸을 신주처럼 모시며 일생을 바쳐온 엄마와 아빠는 나이가 드시면서 나를 더 애지중지 했다. 이럭저럭 때를 놓치다 보니 부모를 떠나 시집가서 살 용기도 없었던 나.
그런 화초여자인 내게 청천병력처럼 다가왔던 태풍. 세상에 천애고아가 되게 했던 그 모진 바람.
사람들은 그 태풍을 『우사』라고 했다. 지난 8월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 충북 영동에 죽마고우의 잔치가 있다며 길을 떠났다. 그 길이 마지막 길이 되었다니.
사람들은 늘 그 자리에 사랑의 대상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지만, 누구든 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을...
어머니 아버지가 시신이 되어 내게 보여지던날 난 충격으로 인해 피를 토했었다. 인생이 늘 화평한줄로만 알던 내게 다가온 고통의 현장에서 난 같이 죽어야 한다며 식음을 전폐하였지만 결국 죽지는 못했다.
사람은 늘 그런 것이리라. 아픔도 세월에 씻기고 부딪치면 야위어지고 가끔 쑤셔오는 통증에 신음하지만 그렇게 아파하며 사는게 삶인가 보다.
어쨌든 난 지금 그래서 부모를 여의고 혼자사는 노처녀가 된 셈이다.
교회로 인도 받고 예배도 참석해 보았지만 아직도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시 된다. 어느 하나 운명에 대해 속시원한 답을 얻은 것도 아니다. 오늘도 바람이 부는데 저 바람은 또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 걸까?
텔레비전을 틀었다.
대통령에 대해 왈가왈부가 너무 심하다. 언론과 다투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불안하게 비추어지는데 무엇이 무엇을 먹으려 하는지 알 수 없다.
갑자기 시장기가 돈다. 라면 생각이 언뜩나고...냄비를 찾아 물을 올려 놓고 창으로 그 남자의 방을 힐끝 본다. 뭐하는 사람이야 정말...
너무 조용한 집.
이 집엔 남자와 여자가 분명 둘이 있는데...왜 그들은 서로를 모를까 그것도 5년이나 같이 있었건만...
내가 너무 한걸까..아님, 너무 차거워 그가 다가오지 못하는걸까? 혹 낮에 내가 그 방에 들어간 걸 알고 기분나빠하는건 아닐까?
낮에 보았던 그 책이 연상된다. 그리고 개미떼 같은 글씨들. 알 수 없는 생소한 단어들..줄거리들..
더 읽어가면 알 수 있을까...
물이 끓는다. 파도 넣고 계란도 넣고, 그리고 또 뭘 넣어야 맛있지?
조리(?)하고 있는 등뒤로 정말 뜻밖에 소리가 들렸다.
"뭐하세요?"
그 남자의 목소리다. 분명 이집엔 그와 나 뿐인데...
5년만에 나를 향해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