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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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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BY 순복이 2003-05-27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잠깐 할까 한다.
척 봐도 상당한 나이차를 가늠 할 정도로 아버지와 엄마의 나이 차이는 무려 열 세 살이나 났다. 얼굴만으로 본다면야 심하게는 며느리와 시아버지로 까지 보는 이도 있었다.
아버지는 덩치가 조그마했다.
마흔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구부정한 허리하며 축 처진 눈꺼풀과 광대뼈의 돌출로 인한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볼, 반백이 되도록 히끗히끗한 머리는 영락없는 촌로였는데 그래도 예전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의 막내 아들이라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를 닮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반에서 나는 싸움을 제일 잘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하나 뿐 이라고 해서 나에게 특별히 애정을 쏟지는 않으셨다. 속정을 잘 나타내지 않는 여느 아버지들과 별 다를게 없었다. 가끔씩 여기저기를 훑듯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시는 것 외에는...


새마을 버스는 우리 마을을 하루에 세 번 지나쳤다.
아침에 한 번, 점심무렵에 한 번, 그리고 해질녁에 한 번 해서 모두 세 번이었다. 전에는 어디라도 갈려고 빨간색 완행 버스 타는 곳 까지가려면 아이들 걸음으로는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야 했다. 그러나 새마을 버스는 100원을 내면 단숨에 완행버스 탈 수 있는 곳 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아직 돈 100원이 아까워서 새마을 버스를 이용한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나는 그 새마을버스를 몹시 한 번 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를 졸라댔는데 열 두 번도 더 조르고 나서야 겨우 학교 갈 때 비가 많이 오면 태워주겠노라는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개울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윗 마을에서 못이 넘치는것을 우려해서 수문을 열어버리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바지를 있는대로 걷어올리고 개울을 건너거나 아니면 보통 한 번 학교 갔다오고도 남는 길을 돌아가야했다.
'어서 비가 왔으면...'
그러나 어지간히 비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잦던 여름비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새마을버스가 다니고 부터는 알밉도록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수 록 버스는 뽀얀 흙먼지만 더 날렸다.

그런데 후덥지끈한 오후 어느날이었다.
여느날 처럼 엄마는 도랑에서 빨래를 하고 나와 친구 병욱이는 그 옆에서 작은 고추를 달랑달랑 내어놓고 멱을 감고 있었다. 그때 저만치서 새마을 버스가 덜커덩 덜커덩하고 오더니 도랑 옆에 멈추었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내렸는데 더 이상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손님은 없는 것 같았다. 운전사 아저씨는 얼른 할머니의 손을 잡고 보따리를 받아내렸다.
부축을 받아서 내린 할머니는 운전사 아저씨의 손을 잡고는 '기사 양반 고맙소'하고 대여섯 번은 말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들은 왜 하나같이 한 말을 또 하고 자꾸 하는지알 수 가 없었다.
'예, 할머니 살펴 가십시오.'하고 할머니를 보내고 긴 다리의 아저씨가 저벅저벅 도랑으로 걸어왔다. 썬글래스라는 까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병욱이와 나는 그런 아저씨가 너무 멋있었서 숨이 멎을 것 만 같았다. 가까이 온 아저씨의 얼굴과 하늘색 셔츠는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왜 이렇게 덥냐!"
엄마에게도 아닌 그렇다고 우리에게도 아닌 아저씨는 혼잣말 처럼 하더니 엄마가 있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물을 한움큼 손으로 받쳐 어푸어푸하고 요란스럽게 세수를 했다. 그리고 구리빛으로 잘 그을린 목덜미도 두 손으로 왔다갔다하며 씻어내렸다.
엄마는 물이라도 튈까봐 몸을 조금 움직일 뿐 그냥 빨래만 묵묵히 했다. 잘 모르는 사내에게 마땅히 할 말이 있을리도 만무 했을것이다.
그러더니 아저씨는 병욱이와 나에게 장난스럽게 물을 한번 튀기더니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깃 엄마를 쳐다보는 듯 했다.
"손이 참 예쁩니다"
서울말 이었다.
순간 빨래하던 엄마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내려올 때와는 달리 돌계단을 훌쩍 뛰어 올랐다.
버스에 오른 아저씨는 끝이 동그란 기다란 막대같은 것을 이리 저리 움직이더니 시동을 꺼지 않았던 버스를 곧 출발시켰다. 뽀오얀 흙먼지 사이로 아저씨의 흰 이가 다시 한번 우리들을 보고 씨익 웃고 있었다. 두 손가락까지 펴보이면서.

엄마의 빨래 씻던 손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