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녀는 수화기를 든 순간 제일 먼저 누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지 망설였다. 작은 언니? p부인. 남편...
여러 사람들을 떠올리던 그녀는 문득 나태한 자신을 멸시라도 하듯 쳐다보던 남편의 눈길이 떠올랐다.
비염으로 고생하는 동안 위로는 커녕 구박만 해대던 그. 늘 컴퓨터 속 팔등신 미인들 속에 파묻혀 세월을 보내는 남편의 야속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녀는 문득 그의 사랑과 관심이 어느 한 구석엔 남아 있을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 싶었다. 그래도 1년간의 열렬한 연애 편지로 그녀를 함락시킨 열정파가 아니었던가.
'그래, 그에게 걸어보자.'
남편의 핸드폰 번호를 누르는 손이 미세한 파동을 일으켰다. 예스터데이의 음악이 울려나오다 멈추고 굵직하면서도 울리는 듯한 남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녀는 웬지 오늘은 마흔의 티를 벗고 연애시절인 청순함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래도 아나운서를 지망할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그녀 아니던가,
늘 남편의 동료들도 그녀의 전화 목소리는 마치 잎새에 구르는 이슬 방울 처럼 맑고 깨끗하여 황홀하다고 극찬하지 않았던가.
"여보, 나."
"어,그런데 무슨 일이야? 순영이 아파? 아님 기정이가 학교에서 안 돌아왔어."
순간 그녀의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르던 자모음이 와르르 무너져 다시금 기도를 타고 흘러 출렁거리는 뱃속으로 잠수를 하는듯한 절망감에 말문히 막혔다.
'그럼 그렇지. 내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고 오직 지새끼들이지?'
와우(네발 오토바이)를 타고 아이들을 귀가 시키다 대문 앞에서 고꾸라져 다쳤을 때도 어디 다치지 않았느냐는 걱정이 아닌 아이들 다쳤으면 그냥 목을 부러 뜨려 죽여버렷을 거라며 미련퉁이 멍충이라고 힐책하던 그의 인정머리 없는 사건이 뇌리를 번개처럼 스쳐갔다.
내가 미쳤지. 이런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후회감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듯 아파왔다.
"응, 올 때 순영이가 좋아하는 피자 사오라고. 순영이가 먹고 싶다네."
"그래? 그럼 사가야지. 우리 공주가 먹고 싶다는데 사가야지."
남편의 대답에 그녀는 코끝이 찡해지며 서글픔이 온 몸을 휘돌았다. 그에겐 나의 존재는 아이들 엄마, 집안일 돌보는 부인일 뿐인 그의 여자로 인식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였다.
갑자기 수화기를 든 손에 맥이 풀리고 그의 핸드폰의 번호를 눌렀던 손을 돌멩이로 짓이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