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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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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BY 액슬로즈 2003-05-12


진희의 고백이 있은 후, 민성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놀라지도 그렇다도 태연하지도 않았다.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단은...역시 당신 몫이예요. 먼저 갈께요]


일주일이 지나도록 민성에게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 연락이 없는 건 경인도 마찬가지였다.
진희와 선애가 지쳐갈무렵, 경인에게서 편지가 왔다.

***************************
진희. 선애에게.
우선 미안하다는 말부터 할께.
나...한국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아.
아빠를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서 다른 곳으로 가서 치료를 해보기로 가족들 모두가 합의를 봤어.
아빠곁에 남는 게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한테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아.
아파트는 그냥 둬. 언제가될지는 모르지만...정리하러 갈테니.
까페는...선애 니가 알아서 해.
정말...미안해. 많이 보고 싶을거야...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다른 방법이 없어.
비록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항상 너희들을 생각할거야.
그리고 내가 니들을 사랑한다는 거. 잊지 말아줘.
진희와 선애 너...
내가 부모 다음으로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야.
미안해...행복하길...

니들의 영원한 벗. 경인.

추신; 그 사람, 재민씨...
재민씨한테 인사 못하고 온 거, 그리고 이렇게 말없이 와 버린 거,
미안하다고...용서해 달라고 전해주면 좋겠어.
어쩌면...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마음이 아픈 걸 보니 재민씨가 싫지는 않았나봐. 훗훗...
행복하길 바란다고...전해줘...
사랑해, 내 친구들....
*******************************8


내용은 그것이 끝이었다.
진희와 선애는 믿을수가 없어서 읽고 또 읽었다.
하늘이 무너진다해도 그렇게 황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충격받지 않을 것이다.
충격...허탈...배신감...
진희와 선애가 느끼는 감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보다 더한 사람은 재민이었다.
그는 진희가 보여준 편지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독한 기집애...이기적인 기집애...어쩜 우리한테 이럴수가 있어?]

선애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내뱉았고 진희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재민은 한참 후 소리없이 일어나 한 마디 인사없이 나가 버렸다. 축 늘어진 그의 어깨를 보자 진희는 더더욱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이별을 던져준 경인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후유증은 오래 갔다.
까페는 일주일간 휴무에 들어 갔고 진희와 선애는 경인이 자주 찾던 바닷가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펑펑 울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뜨거운 여름이 가고
낙엽이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가을이 왔다.
경인의 일은 여전히 진희와 선애에겐 그리움으로 남았고 미움으로 남았다.



[못된 기집애...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전화 한 통 없어...]

[......!]

진희는 말이 없었다. 얘기하기 싫었다. 경인에 대한 말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한 마디라도 나왔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았기에...속에 꾹꾹 눌러 놓은 게 언제 폭발할 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죽은 자도 이렇듯 야속하진 않을 것이다...!

[근데 넌 이 시간에 왠일이니?]

[응...나, 크리스마스때 약혼해]

[그래? 잘됐다! 이번에는 축하해줄께. 그 사람, 예전하고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더라. 니 탓이냐?]

진희는 웃었다.

[에구...경인이가 알면 얼마나 좋아하겠니?...기집애...]

[너 와 줄거지? 결혼식은 네년으로 잡을 계획이야]

진희는 경인의 얘기가 싫어 얼른 선애의 말을 막았다.

[그런데...강 재민씨도 부를거야? 나 그 때 그 바닷가에서 재민씨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재민씨...경인이 정말 사랑했나봐]

진희는 동감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재민을 발견했을 때 진희는 놀랬다. 그가 그곳을 알고 있다는 건 경인이 그를 그곳에 데려 갔었다는 증거고 그것은 경인 또한 재민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는 외로워 보이고 아파보였다.

다행인건 재민이 자신의 쌍둥이 형인 민성과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과 민성이 친부에게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람 사는 일, 알다가도 모른다는 얘기가 딱 맞아. 너랑 민성씨가 그런 사이가 되어 결국 결혼까지 갈 줄 누가 알았냐]

그건 진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민성을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이 서로의 마음 속 말들을 털어 놓은 지 한 달쯤 지난 후, 민성은 학교앞에서 진희를 기다리고 있다가 다짜고짜 차에 태워 데리고 갔다.
그가 진희를 데리고 간 곳은 일류급 호텔이었는데 영문도 모르고 너무 갑작스런 일이나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진희는 그에게 이끌려 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호텔방이었고 그들은 침묵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신기한 건 사랑을 하고 난 후였다.
그들에게 더이상 과거도 존재하지 않았고 아픔도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민성이 그녀를 보듬어 안으며 그랬다.

[우리는 이제 출발점에서 함께 시작하는거요]

그 말은 진희에게 크다란 힘이 되었다. 그리고 데이트가 시작된 것이다. 민성은 여전히 독단적이고 냉철했으나 진실된 행동으로 진희를 대했다. 진희를 우선으로 여기는 배려도 아끼지 않고...
진희는 민성을 아직은 사랑이라 할 순 없지만 가슴에 담을 수는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의 프로포즈를 받아 들인 것이다.

자신의 약혼식이 그렇게 결정되자 경인에 대한 진희의 그리움은 쓰라린 아픔이 되어 찾아왔다.
보고 싶었다.




[냉정한 기집애...우리한테 의논하고 도움을 청하면 어디가 덧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