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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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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BY 액슬로즈 2003-05-11


새해는 소리없이 그렇게 다가왔다.

[으...춥다, 추워]

긴 파마머리를 휘날리며 진희가 까페 안으로 들어 섰다. 바깥에는 또 눈이 내리는지 진희의 가죽 재킷 어깨 부분이 조금 젖어 보였다.

[나 커피 한 잔 줘. 추워서 돌아 가실 것 같아]

[아예 친구 얼굴은 쳐다 보지도 않는구나]

선애가 앞에 와 앉으며 말했다.

[너 요즘 얼굴 좋아 보인다? 누가 그런 소리 않던?]

[후훗...왜 아니겠니? 요즘 같아선 살 것 같아. 무엇보다도 엄마와의 사이가 원만해졌다는 거. 그게 제일 좋아]

진희는 피식피식 웃었다.

[어쨌던 보기 좋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를 진희 앞에 놓으며 경인 또한 덩달아 기분 좋은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결혼 문제는 없었던 걸로 하는거니? 어머닌 니 의사에 맡기겠다고 하셨으니...넌 민성씨 사랑하지 않잖아. 그 문제로 민성씨와 얘기 해 봤어?]

[아니...솔직히 엄마 핑계로 계속 대화를 피하고 있는 중이야. 조만간 만나서 어떻게든 해결을 볼거야. 서로에게 사랑이란 감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아마 얘기 하기는 쉽지 않을까 싶어. 서로 감정 상하는 일이 없이 말이야...그 사람, 내 생각을 대강 눈치 채고 있는가봐. 엄마가 결혼 문제는 나와 상의하라고 하셨으니...]

[안됐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 보는 격이네, 김 민성씨]

선애의 심술맞은 말에 경인과 진희가 그런 선애를 노려 보았다.

[에구, 해도 바뀌었는데 어디 여행이나 다녀올까나...]

선애는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참! 경인이 너 올해는 호주 안 가? 해 바뀌면 부모님 만나뵈려 갔잖아. 언제 갈거야?]

[으응...그렇잖아도...!]

[언니, 전화. 동생이라는데요]

[봐. 알아서 전화 오잖아?]

경인은 빙긋이 웃으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반가워야 할 경인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왜 또 이런 일이 생기지?]

호주로 떠나는 비행기에 경인을 태워 보내고 나오면서 진희가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경인은 다음 날 부랴부랴, 대강 짐을 챙겨 호주로 떠난 것이다.
호주에 계신 경인의 아버지가 위암 말기라는 것이다.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쉬쉬 하다 결국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신 모양이었다.

[아마...힘드시겠지?]

어렵게 선애가 입을 열자 진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재민씨한테 뭐라고 하지? 얘기 하기가 좀 그렇다, 그치?]

[당분간은...그냥 좀 편찮으신걸로 해]

[알바생 한 명 더 써야겠다. 좀 알아봐줄래?]

[음...저녁 시간은 될 수 있음 내가 도와줄께]

[오케이! 고대하던 대답!]

선애는 진희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염려하던 대로 재민은 늦은 시각에 찾아와 두리번 거리며 경인을 찾고 있었다.

[우선 앉으세요. 밖이 많이 춥죠?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좋죠. 근데...!]

[네에. 경인이는 잠시 어디 갔답니다. 잠시만요...]

선애는 손수 커피잔을 들고 나타났다.
선애는 재민이 커피를 다 마실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경인이 당분간...보기 힘들거에요]

재민의 눈빛이 금방 달라졌다.

[부모님이 호주에 계시는데...아버님이 좀...편찮으시대요. 그래서 급하게 호주로 갔어요. 아마 경황이 없어서 재민씨한테도 연락을 못했어요]

[흠...그런 일이 있었군요. 경인씨가 많이 놀랬겠습니다]

[맞아요]

[큰 병은 아니어야 할텐데...경인씨 형제는 어떻게...?]

[달랑 남동생 하나죠]

재민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재민은 자신의 예감이 빗나 간 적이 없었기에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았다. 경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진희와 선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한달이 지나도록 경인은 전화 한 통 없었다. 애가 타는 진희와 선애를 나 몰라하고...

그렇게 또 보름이 흐른 후,
늦은 밤에 진희는 경인의 전화를 받았다. 10여분동안 경인은 울기만 했고 진희 또한 함께 울었다.


[많이 힘들어 해]

진희는 경인과의 통화를 선애에게 알렸다.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아버님과 그 걸 지켜보시면서 괴로워하는 어머님...그리고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며...경인은 울기만 하더라]

[......]

선애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적셨다.
진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여보세요...예...예....네, 그러죠....알아요...그럼......]

[무슨 전화야?]

[민성씨...좀 만나고 싶대. 나 가봐도 되지?]

진희가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