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민의 출현!
또 다른 혼란 앞에서 경인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1초라도 빨리 재민의 시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그는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최소한 경인의 입장에서는 그러했다.
어렵잖게 파출소에서 나온 경인은 그러한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찬바람이 이는 거리에서 경인은 재민의 시선을 피해 주춤거렸고 진희와 선애는 호기심과 고마움으로 재민을 쳐다 보았다.
[고마워요. 덕분에 탈없이 풀려났네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요?]
선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 시간나면 <마리아>에 들리세요. 우리가 폼나게 한 잔 살께요]
'우리'라는 말이 경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렇다고 무어라 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경인은 먼데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행히 재민은 이렇다할 대꾸를 하지 않았다.
[형사신줄은 몰랐어요. 어쨌던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요]
나긋하고 품위있게 진희가 한 마디 거들었다.
[부담갖지 마십시요... 집으로들 가실 겁니까?]
그렇게 말을 하면서 재민은 시선을 경인에게 주었으나 철저히 외면하는 경인이었다. 그 모습에 재민은 야속하면서도 이해하고자 했는지 피식 웃었다.
[글쎄요. 모르죠!]
장난스런 말투로 선애는 재민을 웃게 했다.
[이만...가야겠어요. 고마웠어요]
선애의 뒷말이 무서워 경인은 얼른 대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앞장서서 길을 텄다.
선애와 진희가 재민과 인사를 나누고 따라 붙었다.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가는 경인을 보며 재민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여자.
자신에게 몸을 맡기고 아낌없이 모든 걸 주었던,
한없이 달콤하고 사랑스러웠던 여자가 이제는 차갑기 그지없는 태도로 그를 대했다.
무조건 그를 밀어 내기만 하는 여자.
그러한 여자가 안쓰러우면서도 서운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볼때면, 아니 떠올리기만해도 가슴이 뜨겁게 지펴지는 걸 재민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너, 저 사람한테 쌀쌀맞다는 거 알고 있니?]
진희가 경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뒤돌아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도 잊지 않고...
[쌀쌀은 무슨...!]
[내가 경인이 너 문제에 관해서는 좀 예민한 거 알지? 저 사람은 계속 너를 주시하고 너는 그런 저 사람의 눈빛을 외면하고...]
[맞아! 저 사람, 계속 경인이 너만 보더라? 니한테 반했나봐]
[아니, 그 이상이야. 반한 눈빛이 아니라 원한다고 해야 하나? 아주 깊은 눈을 하고 경인이 널 봤어. 그리고 경인이 너도 이유없이 사람에게 그렇게 냉정하지 않아. 저 사람과 너 사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있는 거 아니야? 뭐 원한 관계라든지...뭐 그런 거?]
곱게 물러날 것 같지 않은 진희의 음성에 경인은 침을 삼켰다. 망설여지는 순간이었다. 무엇이건 비밀이 없는 사이가 아닌가!
진희와는 그동안 말없이 지내온 사이이기는 했으나 알 건 다 알고 있던 관계였다.
[경인이 얘가 뭐 남하고 원한 지고 하는 그런 성격이니? 그 사람이 그냥 경인이 한테 홀딱 반한 거겠지]
경인은 웃었다.
[니들 나랑 어디 좀 갈래?]
[어딜?]
[내가 마음이 꿀하면 자주 가던 곳이 있어. 진희야 솔로니깐 상관없을테고 선애 넌 어때?]
[나도 상관이 없어. 오늘은 신랑한테 허락받고 나온 자유의 날이 아니냐. 가자! 어디든!]
경인이 진희와 선애를 이끌고 간 곳은 바다였다.
소나무 향이 짙게 풍겨져 오고 바다 내음이 물씬 밀려 오는...
파도 소리는 을씬년스러운 어둠을 뚫고 자잘하게...음악처럼 그렇게 들려 오고 있었다.
세 사람은 오랜만에 가슴을 활짝 열고 그 모든 향기들을 들이 마셨다.
[이 곳에 와서 저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잔잔해지는 걸 느껴. 모든 생각들이 다 지워지는 백지같은 나른함... 그 느낌이 좋아서 자주 오곤 했어.
여름이면 이 시간에도 이 곳에 사람들이 많아]
[좋구나...기분이 금새 새로워지는 것 같아]
[정말 머리가 맑아 지는 것 같다. 좋다! 우리 셋이 오니까 더 좋은 것 같다]
살갑게 구는 선애의 말에 세 사람은 웃었다.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세 사람은 차에 기대어 한참동안 말없이 바다를 응시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호텔에 방을 잡았다. 나란히 서서 포말을 일으키고 사그라드는 바다를 한없이 쳐다 보고 있었다.
[야, 술 한 잔 하자!]
길다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선애는 시원한 맥주를 꺼내 들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마음껏 취해서 정신없이 푹 자는 거다. 우리 삼총사가 얼마만에 뭉친 일이냐! 자축 해야지]
[하여튼 선애 넌, 신랑 잘만난 줄 알아야 해. 어느 남편이 아내의 외박을 이렇게 쉽게 허락해주니? 너 남편 업고 다녀야겠어]
진희가 한 마디 하자 선애는 낄낄 거렸다.
[왜 아니겠니. 우리 남편은 자기가 마누라인줄 알고 사는 사람이야]
[넌 복 터진 줄 알아]
[니들도 빨리 우리 남편 같은 사람 만나야 하는데 걱정이다]
경인과 진희는 소리내어 웃었다.
[진희 넌 그 사람과 정말 결혼 할거니?]
캔맥주가 어느 정도 비자 경인이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야, 그 사람은 아무리봐도 아니야. 니들 이제 화해도 했으니깐 진희 너 결혼하는 거 다시 생각해]
[그래, 나 때문에 하는 결혼이라면 그만둬. 진심이야. 난 진희 니가 정말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길 바래]
[이미 늦었어]
대수롭지 않은 듯 진희가 말했다.
[청첩장도 다 나간 상태고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어. 솔직히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지 그것도 의문이고...그럴바엔 엄마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살다 보면 정들겠지 뭐]
[사람이 너무 차가워. 널 원하는 것 같아 보였으나 그게 사랑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
[경인이 말에 동감이야.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더라. 다시 생각해]
[애틋한 마음이 생기고 서로 아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골라. 마음 먹기에 달렸어. 행복할 수 없는 결혼이라면 하지마! ]
[너희들 마음 모르는 거 아니야. 하지만 민성씨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래. 나쁜 사람은 아닐거야. 하지만 너한테 좋은 사람도 아닌 것 같아]
체념인지 갈등인지 모를 눈빛을 하며 진희는 엷게 미소지었다.
[진희야...]
[결국 내가 결정할 문제인 것 같아. 나하고는 아니더라도 우리 엄마랑 민성씨, 참 잘 어울려. 까짓것 효도하는셈 치지 뭐]
진희는 소리내어 웃었다. 마치 남의 얘기하듯...
[자 자! 분위기 깨는 얘기는 그만하고 건배하자!]
[나...그 사람, 강 재민이란 남자, 가게에서 처음 본 거 아니야]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왔다. 좀 더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고 싶었으나 무슨 까닭인지 불쑥 말이 나왔다.
진희와 선애의 눈동자가 경인에게 꽂혔다.
[강 재민씨와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