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770

[제1회]


BY 제영사랑 2003-01-17

이글을 원고에 담고저 하는것은 지나온 나의 일기들을 아니 나의 외로운 인생을 또한 나의 원뿌리도 찾을수 없는 답답한 심정을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처지고 보면 후손에게 아무런 할말은 없다.
하지만 한 부모님의 무책임한 생각 때문에 한 자식은 외로운 길을 방낭하면서 평생의 눈물과 한심이 쌓인 심정을 부딩켜안고 살아가야하는 괴로움은 아마도 격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것이다.
누구보다 맨발로 앞을 보며 뛰어보지만 외로운 길만은 앞을 가로막는 현실속에서 지금도 외로운길을 건이고 있을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 남매의 아버지로서 슬하손들은 성장하여 어였한 부모가 되여 가는 자식들을 바라볼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지만 편부슬하가 되어버린 자식들 볼때마다 무거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이다. 홀로이 태여난 나로서는 대가를 이룬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집안에 울림이 되여주워야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고 젊은 청춘의 나이로 홀로이 이세상을 떠나간 빈자리만을 지키고 있다. 간사람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도 막지 못하는 원망스러운 일일 뿐이다. 한많은 지난세월을 무정하며 한탄스럽지만 묻어버리기엔 너무 한이 많아 몇번이고 반복하여 원고에 글을 담으려고 생각했지만 무산이 되였고 묻어버리기엔 너무 아쉬워서 한페지를 남기고 싶어 원고에 남기고 싶을 뿐이다. 또한 좋은 행운이 따라준다면 언제가는 내가 바라는 핏줄 즉, 혈윤을 찾을 수 있을까하는 기대감도 생각 안할 수가 없는게 현 입장이다. 내가 혈혈단신의 걸어온 세월을 기록하여 후손에게 알려주고저 합니다. 아울러 퇴색되어가는 현실을 우리손대에 몰려주어선 안된다는 의지감도있다. 이제부터 세월은 거슬러서 혈윤의 뿌리조차 알수없는 기구한 사람이 되여야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난 험한 들과 산을 넘어서 현재까지 오게 된점을 기록하기로 하자. 혈윤을 찾기위해 외가를 찾아 헤매던중 외친척은 찾아오나 찾고자하는 혈윤은 찾을수 있는 단서를 찾지못한채 허탈한 심정만을 간직해야 했으니 외가에 대한 사정을 잠깐 알고 넘어가자 외가 성씨는 인동장씨 어머님 형제분들께서 육남매분이시고 그중 2남 4녀로 알고 있고 서열로는 어머님께서 두번째이시다 어머님 아래로 외숙께서 계시였고 이모님들께서 3형제분이 계시었는데 그중 4남매분은 유명을 달리하시고 지금은 두 이모님만이 생존자이시다. 내가 어려서 외가를 찾아올때에는 사남매분이 생존하셨고 외할머니께도 생존에 계시였지만 이분들은 하나같이 어머님의 거처나 행방을 알지못하고 사셨다고 한다. 외가집에대해선 차후에 알기로하자.
이제부터 어린시절 어머님께선 어느곳에서 어떠한 사유에 억매이셨던가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하는 절박한 자식에 심정을 알고 계신지 묻고 싶습니다. 한걸음을 할때마다 차이는 발길 곳곳마다 고독의 숨결은 이가슴을 울리고 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머님을 이해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어머님께선 지금 절 잉태하신후 세상을 방랑하셨다고 한다. 천하고 천한 이자식은 어느곳에서 태어낫는지 조차 알수 없서 갓갓이 태어난 피어린 이자식을 등에 업고 문전으로 문전으로 헤매시면서 다니시던중 1948년 충남 당진군 정미면 승산리 222번지 현지 부락까지 가셨을때 피어린 날 등에 업은체 어머님께선 건강하신 몸은 아니셨다고 한다. 그러던중 이부락 처 자식없이 혼자살고 계신 김영기되시는 분의 후처로 동네 사람들이 권유에 따라 개가하시개 되였다고 한다. 그래도 의지할곳없는 어머님께서 이 어린 자식을 위해서도 마음이 편하셨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어머님께서는 연일의 병마와 싸우셔야 했다고 한다. 그래도 편치못한 몸을 가누시면서 남의 집 품삭을 받아 연명해야하는 환경인지라 피어린 자식을 데리고 전전하셨다고 한다. 심덕만은 착하셨던 분이라서 주의분들의 찬사를 받으시면서 도움도 많이 받은 분이시라고 지금의 생존인들께서 말한다. 반복되는 생활은 어연 한해를 지나 어머님께선 병마가 심하시던중 1945년 음 12월 22일에 세상을 하직하셨다. 이때 나의 나이 세살이 채 되기전이라고 한다. 때마침 시국이 어수선하여 곳곳마다 임경대를 조직하여 야경순찰에 참여했던 양부께서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였더니 어머님께선 세상을 하직하시고 피어린 이 어린자식은 나오지 않는 젖을 빨아 먹드라는 것이다. 유명을 달리하신 어머님께서도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셨을 것만 같다. 어머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시기까지 험난한 세월 가슴에 않고 또한 모든 한 을 가슴에 묻어가셨을것이다. 이제부터는 험난한 현실만이 날 기다리고 유일한 어머님 마저 여의셨으니 혈혈단신이 되어버린 이몸이 맨발로 가시밭길을 건이게 될것이다. 어머님께서 꼭 알려주워야할 본관마저 남기지 않았으니, 어머님으로부터 당신의 친자로 삼아달라는 유언이라 할 수 있는 부탁을 받은 양부께선 이때부터 피어린 날 등에 없고 다니시면서 이집 저집 다니면서 젖을 구걸하여 먹여야 했고, 형제들은 이런 양부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나에게로 이분들의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양부께서도 이 자식을 위해 오줌 똥을 가려주시며 당신께서 하시고자하는 일도 제대로 하시지 못하시면서 주변을 방황하실때 형제분들의 반발은 날로 거세졌지만 피어린 날 어디다 버릴수는 없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다. 이분이 아니었다면 지금 난 이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수가 없다. 세월은 유수와 같더니 여러가지 고난과 반복되는 세월은 어연간 내 나이 여섯살이 되면서 모든 일들을 기억으로 더듬어 낼수가 있다. 실질적인 현실 모든 현실들이 영상에 필름처럼 기록할 수 있다. 이때부터 양부께서는 날 멀리하여 정을 때려하셨다. 형제들의 반발도 반발이거니와 당신의 혼자몸도 감당하실 없는 환경에서 시대적으로도 여러가지 어려운 세상 때이고 간신히 풀대죽을 연명하면서 지울죽을 연명, 그나마도 연명치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보리밥이라도 배부르게 먹이기 위해 부자집으로 일해주기 위해 머리를 도치삼아 찾던 시대였으니 혼자의 몸도 감당하기 어려운 시절이였다. 이것은 내가 보고 느껴온 현실이였다. 양부께선 어느날 갑자기 행방을 감추시고 난 홀로 떠도는 몸이 되여 주변 인가를 기웃거리니 그누구도 반기는 사람없고, 가는 길마다 머물곳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아이들 발길에 채이고 돌팔매에 시달리면서 때가 되면 어느문전에 서성이면 불쌍하게 생각하여 죽 한술 주면 그것으로 끼니를 때우고 밤이면 사랑방을 찾아 밤길 헤매이다 잘 곳없이 남의집 처마밑에 공석으로 이부자리삼아 잠을 청하지만 잠은 오질 않고 설한중은 헐벗은 살갈을 여미우고 허기진 배 참기힘들어 뒤척이다보면 긴밤은 지나가고 동쪽에서 해 떠오르면 양지모퉁이 찾아 봄을 녹이면서도 누구에게 의지할곳 없이 헤매도는 몸 누구에게 원망할수 있었으랴. 양부께서 이곳을 떠나신지 수일이 흘러도 다시 오시지 않았고 난 여러사람들에 발길에 채여 문전걸식에 허기를 채워가면서 갈발없이 건이다보면 하루 해 저물어 어느집 사랑방 그도 거절당하면 밤이슬 하고 벗 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것도 이력이 되였고 하지만 세상은 다 메마른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불쌍히 여기어 헌 옷가지도 찾아 입혀주는 따뜻한 사람도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은가 생각이 된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서 양부께서 다시 돌아오셨다. 난 반가움에 품에 매달려 울음을 터트리며 매달려보았지만 예전 양부가 아니였고 냉냉하고 차가운 언행을 하셨다. 멀찌기 나간줄 알았는데 근처에서 뱅뱅돌고 다녔다며 강한 어조로 내일은 멀찌기 나가라며 구박이셨으니 예전에 인자 하셨던 모습은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도 양부의 품에서 하루밤을 지낸 난 이른날 아침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에서 서산 장 보러가는 장 차가 있어는데 그차를 세우신다. 운전기사 무어라 말을 건이시더니 내 몸을 차에 실어 차는 출발하고 양부께선 손을 흔들고 난 내려달라고 몸부림을 처보았지만 운전기사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내달리는 것이다. 양부께서 운전기사에게 몇푼의 돈을 주고 서산 시장 어느곳에 내려노라고 했나보다 . 이때 교통수단은 매우 불편한 때였다. 우리지역에 지금은 당진군으로 되였지만 그당시에는 서산군으로 정미 대호지면이 서산군으로 소속되었는데 1950년대 서산 나창환 당진 인태식 이두분이 각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는데 당진 인태식씨가 나창환씨를 매수하여 정미 대호지면을 당진군으로 이전한 것이다. 이때 서산 나창환씨는 망신을 당하였고, 인태식은 승승하여 농림부 장관까지 지낸 미래가 있었다. 그런데 교통에 대해서 알아보면 자동차라고 하면 서산 당진해야 차량 10여대에 불과 했었고, 장차라고 하는 차는 사발이라는 작은 차량이었다. 지금 일톤차량을 비교하면 비슷하다 통행방법은 일일 왕복으로 끝났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소달구지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였고, 대다수 보행길였다. 정미에서 서산까지거리는 약 30~40㎞로 알고 있다. 아침에 실린 몸이 서산에 도착했을때 오전 정오를 알리는 싸이렌이다. 운전기사는 내몸을 덮석 안아 내려 놓고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만 것이며, 난 시장을 헤매게 되며 굶주린 배는 음식 내음에 혀가 동원할 정도였으니 가진것 없이 바라 보아야만 하는 철 없는 몸, 해는 서산에 기웃이 넘어가려하고 이 어린몸은 갈곳없이 사방을 두리번 거리면서 어딘가를 가도 망망지대였으니 어린마음에 겁은 나고 소리내며 울어본들 소용없었던 거리 , 어디인지 가다보니 시골마을 한집을 찾아가 잠을 재워달라고 하니 인정많으신 분께서 불쌍하게 생각하시어 하루밤을 재워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시었다. 하루밤을 지낸 난 승산리라는 부락을 물어서 찾아왔더니 주변사람들은 다들 놀라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먼길에서 다시 찾아 왔다는 점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양부께선 날 부등켜 않고 어쩌면 좋으냐면서 눈시울을 글썽이셨다. 아마도 날 내다버리려는 마음은 집안의 각본이였던것같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막내 숙모님께서 찾아와 날 보시더니 멀리기 떠나서 살아가라고 보냈는데 다시 찾아왔단 말이냐면서 호통을 치시며 다시 멀리 나가서 재주 것 살라며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라면서 호통이셨다. 그래도 갈 곳 없어 주변에만 뱅뱅돌다가 이분들이 마음을 상하게 하였나본지 다시금 양부는 집을 떠나고 말았다. 집이라야 남의 집 방한칸을 빌려서 더부살이 하고 있는 형편이라서 집이라 말할수도 없다. 그때부터 이분은 이곳에 다시 오시지 않았고 난 주변을 뱅뱅돌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남의 빈집에 들어가 솥안에 있는 밥을 꺼내 먹기도 하고 남의 눈을 피해 숨어서 나날을 보내면서 지내었다. 우리부락에 최용식씨라는분이 살고 있었는데 이분께선 본처와 이혼을 하고 매일처럼 주막에 다니시면서 술과 벗하며 사시던분이었다. 하루는 이집에 들어가 밥솥을 열어보니 밥이 몇 사발이 있었다. 나에겐 구세주와 같았고 이끼니를 이용하여 온종일 들어다이면서 다 먹어치웠다. 밤이면 남의 집 처마밑이서 거적을 깔고 덮고 밤을 새우자면 잠은 오지않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나면 온몸은 움직여지지않고 떨리는 몸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몸을 이르키며 활동하다보면 어연 씻은 듯 가시고 남의 눈을 피해 양지 모퉁이에 앉아서 몸을 녹이고 나면 어느덧 해는 중천에 솟고 있을때 허기진배를 채우기 위해 어딘가 찾아가보니 어제 그 집이였다. 집은 비어있었고 밥솥을 열어보니 어제와 같이 솥에 밥사발이 있었고 다시금 밥사발을 다 비웠던것이다. 이러던 일도 몇일동안 반복되던 어느날은 솥안에 밥한그릇도 있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에 다시 나와 남의 눈을 피해서 양지바른 모퉁이에서 앉아서 하루를 보내고 전일과 비슷비슷하게 지낸 다음날 내집처럼 다시 들어가보니 역시 어제와 다를봐가 없었다. 난 방안까지 들어가서 먹을 것을 찾다보니 다락방에 쌀자루가 손에 잡히였다. 난 그곳에 앉아서 생쌀을 먹고 있을때 밖에선 어수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네 사람들이 온 것이었다. 겁에 질린 난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숨어있게 되었고 어느새 사람들은 방안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최용식씨께서 다락에 쌀자루등을 꺼내라고 하시자 만용씨가 알았습니다 하면서 다락안으로 손이 들어오자 내 무릎을 잡게된 만용씨는 기급을 하면서 도망을 치다 사람들이 왜? 무슨일이냐면서 웅성거리다가 역시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에 온몸을 떨고 있었을때 용식씨 하시는 말씀이 "용세일 것이다 요 며칠사이에 솥안에 밥을 해 놓았는데 매일처럼 없어지더라 어제 오늘은 이집을 떠나야겠기에 밥을 해 놓치 않았다"면서 방으로 들어와 다락안을 성냥불을 밝히면서 내려오라고 하신다. 겁에 질린 난 할 수 없이 내려와 앉았더니 하시는 말씀이 네가 무슨죄가 있겠느냐면서 네 신세나 내 신세나 다를게 무엇이냐면서 달래어 주시며 너도 이곳에 있지말고 다른데가서 자루라도 가지고 다니며 동냥이라도 하여 맨발벗지 말고 신도 사신고 헐벗지 말고 옷도 사입으면서 살아가다보면 나중에 네가 훌륭하게 큰 다음 옛이야기 하면서 잘 살아라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으니 이때 마을 사람들은 숙연해지고 나에게 불쌍하고 치근하던 모습만이 그들에게 보였을 것이다. 나는 다시 이곳에 있을수가 없었기에 내 나이 여섯살되던 겨울에 설한풍을 안고 타향으로 문전걸식을 하기 위하여 발길을 옮기고 설한풍은 가랭이 홋바지 입은걸 알았는지 매서운 바람은 살점을 여미우고 떨어진 신발에 맨발인 줄 알았는지 눈보라는 치고 이 한몸 어디다 의지 할곳 없고 비빌데도 없으니 어느집 굴뚝에 저녁연기 피어오르면 찾아가 닫친 문을 두드리며 밥한술을 구걸하니 인간의 정인지라 부엌에 데리고 들어가 아궁이 앞에 안치우고 밥한술 나누워주시며 아버지 어머니는 안계시냐며 물을때마다 눈물을 흘리게되고 안계세요 하면서 훌쩍이면 불쌍하다는 듯 아궁이 속 불을 꺼내시여 불 많이 쪼이고 우리집은 잘곳이 없으니 잠일랑 다른집에 가서 자거라하며 친절하신 분이 있는가하면 그반대인분들도 대다수이다. 허기는 때웠으나 잠자리를 찾아 어느 사랑방을 찾아 헤매다보면 호롱불 밝힌 사랑방문을 찾아서 하루밤을 재워주십사 부탁하면 거절당할때가 한두번이 아니였고 거절당하면 다른곳으로 찾아가지만 역시 거절당할땐 할수 없이 검불누리를 찾아 깊숙이 파고 들어가 방을 삼아 기대고 있으면 훈훈한 기운이든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잠이들고 추위에 뒤척이다 잠이든 이튼날 해가 중천에서야 검불누리에서 나와 남의 눈을 피해 다니다보면 아침 점심은 건너 띄우게 되고 하루 한때의 끼니를 때우는 날이 다반수였다. 또한 사랑방에서 잠자리 거절당하는 문제점도 다양하다 나와 같이 구걸하면서 다니던 아이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잠을 재워주면 그냥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가지고 달아난다는것 그러한 습성 때문에 거지아이들을 재워주지 않으려 하며 또한 문제는 온몸이 이가 득실거리기 때문에 하루밤을 같이 자고나면 이들은 다른사람에게 옮겨가서 귀찮게 하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잠을 재워주려 하지 않는데 사실상 누가 옷한번 세탁해주는 사람없이 몇개월을 입고 다니며 목욕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니니 이가 득실거리는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기사 부모형제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어른들도 이들과 전쟁을 치르는 때였으니 그때에 이들고 전쟁은 어쩔수가 없었나보다 .그런데 누가 잠을 재워주려 하며 아무도 우리같은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했고 나는 가는 곳마다 아이들의 표적이 되어 어느 곳이고 내가 지나가면 거지다 거지 새끼 간다면서 앞을 가로막아 주먹과 발길질을 받아야했고 때로는 돌팔매도 맞아야 하면서도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수 없는 혼자의 울분이 였을뿐 세상을 원망하랴 내부모를 원망하랴 누구에게도 원망할 수 없는 고독한 세월이 나에겐 원망스런울뿐이였다. 거리거리 가는 곳마다 한숨이요 눈물의 세월은 내나이를 한살 더하게하고 부자집 마당에 통통방아 차려놓고 가랭이 떡을 빼기 분주하기 시작하며 저마다 설날 준비에 분주하지만 나에겐 모든것이 환상일뿐 갈 곳이 없으니까 별 의미가 없다. 남들은 때때옷에 세배다니며 골고루 차린음식에 만끽하지만 난 그저 바라만보는 거리에 한 사람일뿐이다. 그저 난 전과 동일하게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하여 구걸할뿐이다. 그러던중 어느분께서 너 이렇게 다니면서 고생하지말고 서산 고아원에 들어가서 살아라 하시면서 권유를 하신다. 그곳에 가면 공부도 할수 있고 기술도 배울수있으니 그곳에 가라고 하시기에 그 어른말씀을 따르기로하고 고아원을 찾아가기로 하였다.